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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혁] 나는 그냥 버스기사입니다(2018)

독서일기/교통

by 태즈매니언 2018. 9. 20.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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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식성으로 책들을 읽다보니 선책안이 좀 생기나 싶다. 하지만 내게 에세이는 상대전적이 가장 나쁜 투수유형 같다.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의 통찰을 찾았다가 지위와 명성으로 포장된 함량 미달인 민낯을 확인한 경우가 워낙 많아서...

 

그래서인지, 아직 못보고 있어서 조용히 있었지만(금강변에 파묻힌 변사자가 되지 싶지 않...ㅠ.ㅠ) 곽대중님의 <매일 갑니다, 편의점>, 박철현님의 <어른은 어떻게 돼?> 두 권의 에세이가 엄청난 호응을 얻으며 팔려나가는 모습이 보기 좋다. 김민섭 작가님이 쓴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입니다>와 <대리운전>이 공감을 얻으며 주목받던 때처럼.

 

일하면서 중앙부처 사무관님이나 과장님들을 보면 대부분 정말 열심히 일하시고 하루 종일 바쁘다. 매일 언론을 통해 전달되는 전투적인 구호나 비극적인 외마디 비명들은 모니터에 떠 있는 숫자들과 함께 세종청사 사무실을 떠다니고 있다.

 

세금도둑이라고 욕먹는 공무원들에게 정리된 자료들이 계속 올라가고, 세미나나 토론회, 국회일정으로 매번 전문가와 협회등 이익집단 전문가들의 말도 예의를 갖춰 지겨울 정도로 들어야 한다.

 

하지만, 정작 현장에서 손과 발이 되어 묵묵히 일하는 분들의 조곤조곤한 목소리에게 마이크가 갈 일이 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교통정책을 오래 담당하신 분들도 운수종사자들의 현실을 잘 모르는 것 같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야 하는 입장인 나도 백면서생이라 과연 잘하고 있는지 불안할 때가 많다.

 

작년에 참여했던 버스운전자들의 피로관리를 위한 제도 개선 연구 때 이런 현장 기사님들의 구체적인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이틀 동안 열댓시간 일하고 하루를 쉬는 복격일제나 복복격일제 근무형태는 숫자로만 봐도 아득했다. 우리나라 시내버스 운전자들에게 매주 대서양 횡단비행을 하는 린드버그가 되라는 건가. --;
(이해찬 대표가 국회의원 보좌관일 때부터 노선버스의 장시간 노동 관행을 막아달라는 근기법 개정 요구가 있었더라. )

 

지난 3월 개정된 근로기준법에 따라 올해 7월부터 노선버스 운수업이 근로시간 특례업종에서 제외되었다. 시내버스 운전자가 출근해서 회차지 휴게시간을 빼고는 18시간을 연속해서 근무하는 격일제 근로가 금지되었다. 졸속시행이라고 비판도 많이 받고 있지만 이 책을 보니 시행을 늦추지 않은 게 다행이다.

 

저자 허혁님은 65만 인구의 전주시에서 시내버스 운전을 하시는 5년차 기사님이다. 서울이나 광역시도 아니고 농어촌이 아닌 지방도시, 짧지는 않지만 길다고는 할 수 없는 경력, 격일제와 1일 2교대제를 모두 체험한 경혐자라는 점에서 인상깊었던 부분이 많았다. 저자의 호소처럼 이제는 운임을 좀 올리더라도 승하차시간을 좀 더 넉넉하게 갖고, 배차간격을 유지해야하는 스트레스를 줄이게 운행시간을 늘리는 방향으로 가도록 해야지.

 

시내버스를 자주 타시는 분이라면 누구나 재미있게 읽으실 책이다. 특히 제3부 '버스사용설명서'는 어떻게든 보다 많은 시민들에게 읽힐 방법이 없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 정도로 좋았다. 사회 각 분야에서 이런 에세이를 펴내주시는 분들이 좀 더 많아지길 기원한다.

 

발췌해서 같이 보고 싶은 부분이 정말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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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사람은 본능적으로 가던 길이 막히면 화가 나게 되어 있다고 한다. 운전할 때 유독 짜증이 심해지는 것이 인격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나의 경우는 오전에는 선진국 버스기사였다가 오후에는 개발도상국, 저녁에는 후진국 기사가 된다. 친절은 마인드의 문제가 아니라 몸의 문제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108쪽

 

시내버스기사만큼 정직한 직업도 드물다. 차 바닥에 떨어진 십 원짜리 동전 하나라도 보는 즉시 돈통에 넣는다. 하루 종일 CCTV 네 대가 안팎으로 기사를 돌본다.

 

134쪽

 

좁은 회사 마당에 백 대 가까운 버스를 세워두었다가 교대하는 짝꿍이 깜깜한 새벽에 운행할 버스를 찾아서 빼 나가는 것이 쉽지 않다. 예쁘게 청소 단장하고 깊이 잠들어 있을 짝꿍에게 문자를 넣는다.
"충전소 쪽 원룸 골목에서 네 번째 뒷줄."

 

146쪽

 

보통 15초짜리 좌회전 신호에서 맨 선두 차가 일각도 지체하지 않고 바로 나갔을 때 일곱 번째 버스가 꼬리물기를 하고 간신히 빠져나간다. 요즘은 신호대기만 걸리면 다들 스마트폰 보느라고 짧은 좌회전 신호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156쪽

 

운전할 때 사람 말소리가 들리면 짜증이 난다. 그 말소리에 자꾸 끌려들어간다. 무시하고 운전에 집중하면 좋겠는데 잘 안 된다. 더군다나 버스는 철판으로 둘려 있어 소리가 울리면서 증폭된다.

 

160쪽

 

시민모니터단이 비밀리에 버스에 올라 친절기사를 선정하는 방식은 다른 시각에서 보면 인권 침해이자 노동 착취다. 문제의식을 갖는 사람도 드물고 오히려 시 행정의 성공 사례로 홍보되고 있는 현실이 슬프다.
(중략) 현재의 친절기사 선정 방식은 비록 좋은 의도로 하고 있다 해도 부끄러운 일이다. 사회 전반의 시스템 문제를 들쑥날쑥한 인간의 품성에 기대어 해결해보려는 것은 너무 궁색하다. 버스운전 경험이 없는 시민모니터단이 무엇을 알겠는가! 승객에게 일일이 인사하거나 할머니 보따리를 받아주거나 신호를 잘 지키거나 등의 당장 눈에 드러나는 것들만 보일 텐데,

 

172쪽

 

기사가 부족한 상태에서 입사 일 년 안에는 상여금 지급액이 적기 때문에 임금부담이 적어 회사에서 일을 많이 준다.

 

184쪽

 

전주 시내버스 영업 비밀 중 하나가 막 내달려야 차내 안전사고도 없고 기사도 편하다는 것이다. 선진국 기사처럼 다니면 승객도 선진국 승객처럼 기사를 배려하고 차내 정숙을 유지해줄 것 같으나 전혀 딴판이다. 전화는 더 해대고 꾸벅꾸벅 졸다가 벨도 늦게 누르고 버스 설 때까지 앉아 있다가 진짜 선진국 손님처럼 내린다.
(중략)
시내버스는 하루 종일 "끽끽" 브레이크 밟는 것이 일이다. 관광버스는 달리기 위해서 서고 시내버스는 서기 위해서 달린다. 당신 몸이 앞으로 안 쏠리면 시내버스가 아니다.

 

186쪽

 

몸으로 먹고사는 사람은 팔짱 끼고 자신을 부리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생각이나 눈으로는 쉬워 보여도 막상 몸으로 그 기대를 실현해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몸으로 하는 일은 제약이 많고 해도 해도 안 되는 경우가 있다.

 

200쪽

 

CNG(압축천연가스)차량은 기어 변속에 유격이 없어 운전이 뚝뚝 끊긴다. 스타트 이후에 이 단은 30km/h, 삼 단은 45km/h에 딱딱 맞춰 기어 변속을 해줘야 멈칫거림이 없다. 경유를 주 연료로 쓰는 고속버스나 관광버스보다 승차감이 떨어지고 운전이 피곤할 수밖에 없다.

 

219쪽

 

시내버스를 타고 시내버스를 찍으러 다니면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기사가 승객이 되고 그 승객이 다음 날 기사가 되면 운전의 품질이 향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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