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솔아] 눈과 사람과 눈사람(2019)
<최선의 삶> 재독에 이어서 같이 빌려온 임솔아 작가님의 단편집 <눈과 사람과 눈사람>. 예전에 읽었던 단편집 <아무 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보다 2년 먼저 출판된 작품집이더군요. 그만큼 더 직설적인 어조가 느껴졌습니다.
평론가들은 문학적 완성도를 어떤 기준으로 평가할지 모르겠지만, 저는 소설보다 르포르타주에 가까운 작품일수록 더 와닿더군요. <병원> -> <추앙> -> <뻔한 세상의 아주 평범한 말투> -> <눈과 사람과 눈사람> -> <줄 게 있어> 순으로 좋았습니다.
저자의 개인사에 대해 모르지만 또래와 함께 고교를 졸업하고 바로 대학에 입학해서 문학을 전공하지는 않았고, 학교 밖 청소년 생활을 하면서 온갖 일자리들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는 걸 각 단편들의 묘사에서 알 수 느껴집니다.
문단 내 성폭력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입장 표명을 하고 출판권 계약서에도 이에 관한 조항을 넣은 분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자신이 피해자이기도 했었다니.
벌써 거의 10년 전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즈음 십대후반부터 이십대 초반 여성들의 시선과 이들이 경험할 법한 일들이 뭐였는지 단편들을 통해 되짚어보게 됩니다.
책을 덮으면서 '핵가족마저 깨진 상태로 자라난 아이들은 한국사회에서 1차 집단이 주는 순기능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하고 어른이 되는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각 단편의 주인공들이 그 또래의 여성으로서 가지는 성적인 매력을 영악하게 이용하지 않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고요. 하지만, 너무 책임감이 강한 순둥이라 착취당하고 통제/조작 당하면서 혼자서 안으로 스트레스를 삭이는 모습들은 안타깝네요. 사람이 세 명이 모이면 정치가 시작된다는데, 한국사회에서 누릴만한 지대가 없는 개인이 저런 태도와 마음으로 40대 이상까지 버티며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싶어서요.
----------------------------------------
91쪽 <추앙>
이 상황을 정원은 현석에게 털어놓았다. 문학계에 뿌리박힌 여성혐오의 오랜 역사를 현석은 한탄했다. 그리고 그는 최근 여성혐오적 언행으로 이슈가 된 P시인을 비판하는 글을 SNS에 올렸다. P시인에 대한 글을 꾸준히 올렸지만, B강사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현석은 홈리스 여성들의 불안정한 삶에 대한 글을 공유했고, 온라인 서점 대신 작은 동네 책방을 이용하자는 글을 올렸으며, '자유로운 영혼의 시쓰기란'으로 시작되는 B강사의 글을 공유했다. '성추행범은 말할 자격이 없다'는 현석의 글과 '거침없이 말해야 한다. 시인은 무엇을 말하든 시가 된다'는 B강사의 글이 번갈아가며 SNS에 올라왔다.
92쪽 <추앙>
그러나 이제 '시적 허용'이라는 말이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그 말이 어떤 부당함을 시적 특권으로 포장하는 듯했다. 그 특권을 누리는 자들은 그것을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고 표현하고는 했지만, 그들의 디오니소스적인 면모는 타자, 그중에서도 유독 약자 앞에서만 강하게 분출되는 특징이 있었다.
95쪽 <추앙>
객관적인 사실을 드러내는 동시에 주관적인 고통을 전달해야 했다. 개인의 경험이나 아픔을 드러내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되었다. 사회의 윤리 바깥으로 나아가려는 문학을 추앙하는 태도와 그런 태도를 가진 자들을 추앙하는 태도가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이 연결에 얼마나 내밀한 권력관계가 작동하는지를 적어보고 싶었다. 연결 안팎에 있는 이들에게 권력관계가 얼마나 아무렇지도 않게 폭력으로 행사되고 있는지를 드러내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정원은 자신을 위해 말을 해야 했다. 타의에 감금된 자신을 최소한 자기 자신을 마주할 때에는 풀어주어야 했다.
119쪽 <뻔한 세상의 아주 평범한 말투>
언니가 정상이라는 착각을 유지하기 위해서 내가 필요할 거라는 걸 알아. 나의 정상으로 보이지 않는 면들이 정상적이고 싶어하는 언니의 욕망을 채워준다는 것도 알아. 언니의 다정함이 선의라는 건 물론 잘 알아. 하지만 고맙지는 않아. 너무나 오래 위장해왔기 때문에 무엇을 위장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어가는 것을 정상이라고 말하면서, 다 함께 공평하게 곪아가고 있었으니까. 나는 언니에게 이 말을 왜 하는 걸까. 이 말을 하는 것이 나의 선의라는 걸 언니는 이해해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