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솔아] 나는 지금도 거기 있어(2023)
임솔아 작가님이 2023년에 출간한 두 번째 장편소설. 제 올해의 소설 후보로 올립니다.
업계의 경계에 한 다리 걸친 애매한 상태의 예술가 네 명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작은 전시회를 하나 하게 됩니다. 장애인 남성 석현 외에는 모두 여성인데, 석현의 여친으로 어쩌다 모임에 참여하게 된 평론가 화영이 첫번째 파트의 주인공이지요.
화영, 우주, 보라, 정수 네 여성이 소설의 네 파트에서 각자가 화자가 되어서 릴레이처럼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파트별로 독립적인 느낌도 있어서 옴니버스 소설을 읽는 느낌이며, 쭉 따라가다보면 이 네 명이 어쩌다가 서로를 알게 되고 같이 전시회를 하게 되었는지가 나옵니다.
한 번의 전시회를 했을 뿐이고, 이들의 단톡방은 얼마 지나지 않아 특별한 일이 없으면 메시지가 올라오지 않는 죽은 단톡방이되지요. 공동체가 사라져버린 현대 한국의 도시생활에서는 이미 익숙한 일입니다.
화자인 네 여성들의 공통점은 살아오면서 누군가를, 혹은 태도에 대한 신념을 위해서 자신의 본모습을 지우고 꽤 오래 원래의 자신이 아닌 모습대로 살아온 경험이 있다는 점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미 쉽지 않고 상처를 남긴 그 경험이 있기 때문에 부유하듯 만난 관계 속에서 섣불리 누군가의 편이 되어주지 않습니다. 다만, 상대방이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그저 차분히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감당할 수 있는 정도로 자신의 공간을 내어주고, 시간을 같이 보낼 뿐이지요.
아마 그래서 임솔아 작가님이 외국 시인의 시에서 따온 '나는 지금도 거기 있어'라는 제목을 붙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는 시에 관심이 없지만, 임솔아 작가님은 소설과 함께 시도 꾸준히 쓰시는 분이더라구요.
어찌보면 세상과 관계에 대해서 지나치게 냉소적이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저는 나이가 들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람들과 만나고, 우정이나 애정을 갈구하며 맺는 관계들의 태반이 자연스럽고 지속가능한 조화와 균형이 아닌 둘 중 한쪽의 인내로 유지되는게 아닌가 싶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살아오면서 맺어온 인간관계를 정리했던 경험들을 떠올려보면 자연스럽게 끊어지거나 침묵과 차단으로 끊어냈지, 서로 충분히 노력한 끝에 상대방에 대한 아무런 원망도 없이 자기가 더 행복한 선택을 한 상대방을 담백하게 보내준 적이 생각나지가 않네요.
두 번째 파트 <관찰의 끝>에서 우주와 선미가 식탁 앞에서 찻잎을 직접 우려서 끓인 밀크티를 같이 마시고 담담하게 이별을 결정하는 장면이 그래서 참 좋았습니다. 세 번째 파트의 일터 배경인 담배회사 자회사의 여성 영업사원과 패밀리레스토랑 프랜차이즈에 대한 논픽션급 묘사도 역시 임솔아 작가님이구나 싶었고요.(설마 둘 다 직접 해보신 일이려나요.)
굳이 이렇게까지 이별해야하는 상황은 안겪고 싶지만, 누군가와 절연해야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저도 이렇게 헤어지고 싶네요.
전체적으로 저는 네 명의 화자 중 '보라'에 가장 감정이입을 하며 읽었습니다.
임솔아 작가님의 단편과 장편을 읽으면서 소설에서 한 번도 결혼생활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부부가 다뤄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남성들에 대해서 고단한 세상을 살아가는, 성질이 더럽지만 축력이 필요하니 마굿간에서 함께 살아가는 당나귀같은 존재로 여긴다는 느낌을 받았는데요. 이런 시선이 동성애자가 이성을 볼 때 느끼는 감각인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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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쪽
석현은 다정했던 사람들을 한 명씩 떠올렸다. 병원에서 만난 환자들. 간호사와 치료사들. 동네 이웃들. 버스와 지하철, 편의점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석현의 친구가 되었던 아이들. 다정한 관계였지만 깊이가 없었다. 지속성도 짧았다. 그래서 끝까지 다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큐베이터를 옮겨가며 살아온 것 같았다. 그들의 따뜻함을 가식이나 거짓이라 여기지는 않았다. 병실 커튼 안쪽에서 본 할아버지의 표정처럼, 지속성이 없는 사람에게만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었는지도 몰랐다. 석현은 매 순간 진심으로 사람을 대했다. 깊이 없이. 관계가 지속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따뜻한 말, 다정한 말, 옳은 말만 했다. 타인에게 말할 수 없는 것들은 작품에 담았다. 그러나 작업을 할 때조차 적정선을 지켰다. 석현에게 기대되는 이미지를 깨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래야 자신을 지켜낼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107쪽
여자아이들은 비밀이 누설될까봐 두려워했다. 동시에 자신의 비밀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그룹 내에서 한 명의 아이가 따돌림을 당할 때에도 비밀은 번번이 이용되었다. 그 아이가 어떤 애인지를 아이들은 말해버렸다. (중략)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을 아이들은 만끽했다. 한편으로는 진실을 폭로당한 아이가 어떻게 추락해 가는지를 학습했다. 그 아이가 되지 않기 위해 더더욱 결속을 다졌다. 때로는 남의 비밀을 조작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조작에 가담하는 것도 일종의 비밀이었고 결속이었다.
165쪽
한 명이 무너진 그 순간에 다른 한 명은 무너지지 않았다. 약속이라도 한 듯 침묵했다. 서로의 침묵에 잠깐씩 기대며 우주와 선미는 무사히 멀어졌다.
211쪽
보라는 아르바이트생들이 물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조금이라도 틈이 있으면 그 사이로 스며들었다. 한번 눈감아주면 같은 잘못을 반복했고, ㄴ그럽게 대해주면 선을 넘었다. 보라가 받는 평가서는 매번 아슬아슬했다. 보라가 무엇을 감내하고 있는지를 아르바이트생들은 몰랐다. 못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보라가 얼마나 먼 길을 돌아가야 하는지를, 보라가 무엇과 싸우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매니저뿐이었다. 보라가 하루빨리 그 싸움에서 패배하기를 바라는 사람. 그러나 보라는 가끔 이상한 안도를 느꼈다. 그래도 한 사람은 이 싸움을 알고 있다는 안도였다. 매니저조차 알아주지 않았다면 너무 외로웠을 것 같았다. 일찌감치 무너졌을 것이다. 보라는 이제 매니저와 비슷한 사람이 되어 있을까? 매니저와 좋은 동료가 되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상상만으로도 지긋지긋했다.
296쪽
미술 작가로서 제도에 안착하는 사람의 수는 생각보다 적었다. 한 다리만 건너면 서로가 서로에게 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어느 자리에서 어떤 말을 꺼내든 일주일이면 소문이 되어 퍼져나갔다. 좁디좁은 네트워크를 활용해 인맥을 쌓을 수도 있겠지만, 인맥이라는 것이야말로 가장 아슬아슬하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되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외부의 사건에 대해서는 첨예하게 각을 세우되 내부의 문제에 대해서는 최대한 침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