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도시토목건축

[강정혜] 공동체와 도시공원(2025)

태즈매니언 2025. 6. 21. 18:14

 

로스쿨 입시를 준비하면서 여러 법조인들의 에세이를 읽었었는데, 사법부의 속내같은 눈에 확 띄는 에피소드가 없어서인지 대중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책은 아니지만 <정의의 여신, 광장으로 나오다>가 <법정의 역사>와 함께 기억에 남더군요.

저자께서 한옥을 짓고, 꽤 오랫동안 용산 미군기지 반환부지를 뉴욕의 센트럴파크와 같은 도시공원으로 만들고자 하는 모임에서 활동하시면서 논문을 쓰신 건 알고 있었는데, 도시공원의 중요성을 정치철학적으로 제시하는 책도 쓰셨네요.

어제 읽었던 <나이 들어 어디서 살 것인가>가 고령자들을 위한 주거공간과 커뮤니티 시설이 갖춰진 공동체를 제안했다면 이 책은 가족 외의 1차 집단이 모두 무너진 자본주의에서 개인주의와 공존하는 공동체주의가 유지될 수 있는 방안으로 도시 속 공유하는 녹지공간인 도시공원의 활성화를 제안합니다.

책의 주제는 5페이지 가량의 서문으로 잘 요약되어 있으니 서문을 보고 관심이 생기신 분들께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제가 아내와 몇년 전에 가봤던 시드니시는 외곽은 물론 고밀도 중심상업지구에서 15분 이내로 걸어나오면 관리가 잘 된 평지의 도시공원을 걸으며 동물들을 만날 수 있어서 참 좋았던 기억이 나네요.

책을 다 읽고 나니 한국의 국토환경과 아파트 위주의 주거문화를 고려했을 때, 저는 사람들 사이에 상호작용이 있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하나의 커다란 공원보다는, 각 생활권마다 근린공원과 함께 건폐율이 낮은 아파트단지들을 잇는 회유식 산책로로 연결된 복합커뮤니티센터(도서관+공공키즈카페+데이케어센터+실내 운동시설+공연장+로컬 식료품 가게), 그리고 지자체가 임대하는 도시텃밭을 세트로 갖추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건폐율이 낮은 이웃 새롬동의 아파트단지. 가운데 도시공원 바로 옆에 복합커뮤니티센터와 로컬푸드 판매점 싱싱장터 매장이 있어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모델과 가깝습니다.

 

제가 사는 세종시 다정동에는 1만 가구에 3만 명이 조금 못되는 주민들이 살고 있는데, 도시는 이 정도 규모마다, 군지역은 읍소재지에 이런 시설을 갖추면서 축소도시로 가면 좋지 않을까요?

예전 학부시절에 지금은 은퇴하신 정치학자 김홍우 교수님의 <서양 정치사상사> 수업을 통해 영미 보통법의 법원(法源)에 대해 배웠는데, 이 책에서 중간중간 인용하는 정치사상가들의 메시지를 들으면서 1215년의 마그나 카르타보다 2년 늦게 체결된 1217년의 삼림헌장에 담긴 공유지에 대한 접근이용권이 지금의 한국사회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자크 아탈리식 '관계의 경제'로 삶의 방향을 틀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평생 온라인 속 관계를 주된 정체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 오프라인에서의 관계도 중요하고 은퇴한 직장 선배들의 모습을 보면 우리 사회에 건강한 공동체 문화가 부족하다는 점을 절감하거든요. 80년대 끝자락에 농촌마을의 공동체 문화를 살풋이나마 경험해서 더 이렇게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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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쪽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는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개인이 사라지면, 공동선을 이루는 공동체도 약화된다. 개인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것은 공동체주의가 아니라 집단주의 또는 전체주의이다.

34쪽

공동체가 해체되고 개인이 해방될수록 국가의 권력은 더 강화되고 전체주의로 흐를 위험이 있다. 인습의 굴레에서는 벗어났으나, 고립과 외로움으로 인하여 단 하나 남은 조직인 국가에의 귀속감을 느끼면서 파시즘이나 공산주의의 발흥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49쪽

우리 사회에서는 개인주의가 점점 팽배해져 개인은 타인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자신을 이 사회로부터 소외시키면서 자신만을 모든 문제에 대한 책임 주체로 만들어 가고 있어, 결국 개인이 할 수 없는 일은 모두 국가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나 개인이 해결하지 못하는 모든 문제를 국가가 해결해 줄 수는 없으며, 이익은 사유화하면서 손실은 사회에 전가하는 체제는 유지될 수 없고, 국가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국가의 인력과 재정의 한계와 그 집행에 있어 엄청난 거래 비용이 소요된다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으며, 그런 문제 전부를 국가에 맡기게 되면 국가의 개인에 대한 지나친 간섭을 자초하는 결과가 될 위험이 있다.

133쪽

이와 같이 토지 소유권이 없는 사람들은 커먼즈라는 공유지에서 땔감, 식량과 같은 자원을 의존하였고, 이곳은 그들에게 생계수단 역할을 했고 실업이나 낮은 임금에 대한 안전망의 역할을 했다.
또한 이곳은 노인들이나, 여성들과 아이들을 위한 사회적 보장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추수가 지난 후 이삭을 줍고 땔감을 모아 겨울을 났고 아이들은 나무 열매를 줍거나 수풀 속에서 딸기류를 땄으며, 가축인 돼지, 양을 돌보거나 목초지에서 양털을 모았다.

150쪽

산림헌장은 대표적인 커먼즈인 물, 음식, 연료, 주거지에 대한 소작인들이나 평민들의 접근이나 이용을 성문으로 권리화하여 국왕에 의한 공적 통제와 귀족에 의한 사적 통제로부터 보호하였다는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다. 커먼즈에 대하여 관습 또는 관습법으로 내려오던 것이 성문법화되어 그 존재를 공시하고 명문화한 것이다.
오늘날 도시의 도시민들에게는 커먼즈의 한 종류인 공원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이나 이용권이 있다는 논리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164쪽

우리나라의 전체 국토의 63.5%가 삼림이다.
(중략)
그런데 시민들이 별도의 시간이나 비용을 들지 않고 실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가로수, 학교숲, 근린공원 등 밀착용 도시림(생활권 도시숲)은 전체 국토의 0.5%, 전체 도시림 면적의 3.7%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