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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남]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2013)

독서일기/로마사

by 태즈매니언 2018. 4. 11.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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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자격을 갖고 계시면서 30년 넘게 로마에서 사신 한국인이 있으셨네요.저자 정태남님은 로마가 건국한 BC 8세기경 팔라티노 언덕의 '로물루스의 집'부터 AD 4세기 제국의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기기 직전에 세운 '콘스탄티누스 개선문'까지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로마에 세워진 37개의 주요 건축물들을 이 한 권으로 소개해주십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절의 욕탕건축기사를 주인공으로 다룬 일본만화 <테르마에 로마에>를 보면서 일본을 부러워했는데 위안이 되네요.

왕정(참주정에서 수정)시기와 공화정 시기 로마제국 시기의 전후기와 말기로 나눠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서술하기 때문에 로마사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만 있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건축에 문외한인 이들을 괴롭히는 전문용어는 많이 생략하고 왜 이 건물이 세워졌고, 당시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조곤조곤 설명해주시는 걸 읽다보니 비행기타고 훌쩍 떠나고 싶어지는게 문제네요. 이... 책 챙겨 들고 아이폰 구글맵앱에 찍어 둔 좌표들 보면서 로마시대 건축물 유적지들 답사해야죠!

 

49페이지 상단의 있는 왕정 말기~공화정 초기의 로마 모습을 재현한 모형사진을 보니 초기의 로마는 방어에 상당히 유리한 지형이었군요. 팔라티노 언덕과 캄피돌리오 언덕은 웅진 백제시절 높은 구릉을 끼고 도는 금강옆에 축조한 공산성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웅장한 건물들에 가려져서 왜소하게 느껴지는 '포룸 로마룸(포로 로마노)'가 왜 저 위치에 있는지(유사시 후퇴해서 싸울 산성요새의 통로), 에트루리아의 선진 기술을 전수받아 더욱 발전시킨 로마의 건축술을 상징하는 최초의 건물인 유피테르 신전은 로마시민의 공동체의식 형성에 꽤 큰 역할을 했을 것 같네요.

책에서 소개하는 로마시대의 건축물 중에서도 저는 '트라야뉴스 시장터'와 '인술라' 건물이 각별했습니다.

 

퀴리날레 언덕을 깎아서 만든 공터에 트라야누스 포룸을 세우고, 깎인 언덕이 무너지지 않도록 계단식으로 깎아서 170개 이상의 점포들이 있는 스트리트몰을 꾸미다니. 정치나 군사, 종교적인 목적으로 세운 건물들보다 AD 2세기에 세운 메세나폴리스같은 상업용 스트리트몰을 직접 보고 싶네요. 그것도 석재가 아니라 콘크리트와 벽돌을 써서 지었다니.

 

인술라는 우리가 로마시대의 고가수로, 도로, 교량의 실용성과 견고함을 떠올리는 것에 반해 날림공사와 부실공사때문에 생활하기 불편하고 하중을 견디지 못해 붕괴사고가 자주 일어나 당시부터 악명이 높았다고 하네요. 하지만 이렇게 3~400명이 한데 모여 살 수 있는 공동주택덕분에 제정시대 로마가 80~100만의 인구가 모여살 수 있었지요.

 

제가 무척 재미있게 봤던 HBO의 역사드라마 <로마>의 세트장을 만들 때 제작자들이 뭄바이의 혼잡한 시내를 참고했다고 합니다. 전근대시대에 이정도의 밀집도시는 중국의 대도시나 도쿠가와 막부시절의 에도 밖에 없었겠죠?

 

저도 한 때 토건족 먹여살리기라고 손가락질하던 사람이라 찔리긴 하지만 비용편익분석 결과가 어느 정도 나온다면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하는 것만큼 효과좋은 보편적 복지제도는 없다는 페친의 일갈에 공감합니다.

 

건축과 전쟁. 두 가지 분야 모두 합리적 사고, 공학적인 능률성, 다양한 전문분야 종사자들과의 협업이 필수적인 오랜 기간 큰 돈이 들어가는 프로젝트성 사업입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리더쉽을 다른 분야보다 잘 키워주고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혹독한 검증에서 도태되기 쉽다고 생각하고요.

 

전 제정 로마가 온갖 악재에도 불구하고 쉽게 무너지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가 자기 군단을 거느리고 평시엔 건축을 비상시에는 전쟁을 수행했던 CEO인 군인황제들을 배출했던 로마의 인재등용시스템의 덕이라고 봅니다. 지금 시대라고 딱히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고요.
(토건족 하수인의 변명이 길었나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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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쪽

 

로마는 에트루리아인, 라틴인, 사비니인들이 서로 교류하기에 매우 좋은 테베레 강의 하류에 자리 잡고 있어서, 남쪽과 북쪽지방을 연결할 뿐 아니라 내륙지방과 바다를 연결하는 데 매우 좋은 지점에 위치했기 때문에, 로마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길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249쪽

 

인술라(insula)는 '섬'이라는 뜻으로, 고대 로마의 서민들이 살던 다층공동주택을 일컫는 말이었다. (중략) 캄파돌리오 언덕 북쪽면에 있는 인술라는 서기 2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규모는 6층으로 약 380명이 살았던 것으로 추측되지만 (중략) 서기 350년경의 기록에 의하면 로마에는 개인 소유 단독주택은 1,782채밖에 되지 않았고, 인술라는 4만 6,602동이 있었다고 한다.

 

도시의 인술라는 주로 임대용이었다. 로마는 수도권 인구 집중으로 인하여 땅값이 비쌌기 때문에 임대료도 매우 높았다.인술라는 일반적으로 6,7층으로 되어 있었으며, 1층은 상점이나 작업장으로 이용되었는데, 유럽 도시의 건물들은 현재도 대부분 이와 유사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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