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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명묵] 러시아는 무엇이 되려 하는가(2023)

독서일기/러시아

by 태즈매니언 2023. 12. 21. 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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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에 이 책을 샀지만 요즘 제가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문제들에 위주로 시간과 관심을 쓰다보니, 손이 잘 가지 않더군요.

그러다가 며칠 전부터 뉴스에서 벌써 2년 가까이 끌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러시아의 승리로 끝날 것 같다는 의견들이 보이길래 지금까지의 익숙한 세계가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에 대한 의견을 차분히 들어보고 싶어졌습니다.

저는 예전 슬로우뉴스 연재글부터 임명묵 작가의 글을 쭉 봐왔고 임명묵닷컴의 유료구독자라 전쟁발발 전의 우크라이나 여행기와 전쟁 중의 볼가강 여행기도 읽었는데, 이 책에서 의외로 저자 자신의 체험에 대해 서술하는 부분은 적습니다.

푸틴의 러시아가 왜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게 되었고, 전쟁수행의 부담을 지고 있는 러시아 국민들이 이러한 결정을 지금까지 지지하고 있는지에 대해 여러 저작들을 소화한 지식을 기반으로 범세계적인 지정학 사건들을 꿰어서 설명하지요.

<거대한 코끼리, 중국의 진실>과 비슷한 스타일인데 다루는 스케일이 훨씬 커지고, 보통의 한국인들이 중국보다 러시아에 대한 배경지식이 적다보니 읽어내는 부담이 더 있긴 합니다.

극적인 사전들 위주로 진행하며 영화를 보는 것같은 긴박감을 주는 서술이 아닌, 세계관의 충돌이라는 큰 흐름을 보여주는데요. 러시아 사례를 중심으로 서구 자유주의와 대비되는 대표적인 사례인 신전통주의와 유라시아주의의 연원과 핵심 개념을 알려줍니다.

러시아에 대해 관심이 없더라도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에 균열이 생기고 제국의 정체성을 내세우며 서구와 다른 길을 주창하는 국가들이 합종연횡하고 있는 국제정치를 이해하려는 이들의 시야를 확 넓혀주는 정치사상사 분야의 훌륭한 대중교양서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지식들을 조합해서 이야기로 정리하는 저자의 능력이야 한 번이라도 임명묵 작가의 책을 읽어본 분들은 이미 아시겠지만, 저는 특히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고르바초프에게 보낸 편지를 넣은 서술에서 감탄했습니다.

대한민국을 비롯해서 자유주의세계의 주축 국가들에서 공동체들이 약화되며 핵개인화되면서, SNS를 타고 흐르는 메시지들이 고등종교의 열화판 대체재 역할을 하는 상황입니다. 국민들 사이의 사회경제적 격차가 커지는 구조 속에서, 정체성의 정치가 발흥하는 상황을 보면 답답하네요. 이런 와중에 내년 미국 대선에서 고립주의자 트럼프가 다시 당선된다면 어떻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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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1989년에 끝난 것 같았던 역사는 왜 다시 시작된 것일까? 푸틴은 어째서 무모해 보였던 전쟁을 결정한 것일까?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질문에 대한 답들이다. 말하자면 '시작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29쪽

끝으로 이 책에서 나는 러시아가 아닌 다른 나라들의 역사를 둘러보며, 푸티니즘의 등장과 역사의 시작이 러시아-우크라이나의 단층선을 넘어선 전지구적인 일임을 이야기할 것이다.

146쪽

요컨대, 역사를 돌이켜볼 때 푸틴이 처음부터 서구 세계와 대적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지닌 채 집권했다는 증거를 찾기 어렵다. 당시 푸틴이 원한 것은 러시아의 재건과 그를 통한 자신의 권력 확보였다. 러시아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항하는 올리가르히들을 제압해야 했고, 지방 유력자들의 자치를 회수해야 했으며, 체첸 등의 분리주의자들을 철저히 억눌러야 했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재원은 서방의 원자재 수입국들이 제공할 것이었다.

170쪽

2011년에 시작된 리비아 공습과 러시아 본토로 다가온 색깔혁명을 보면서 크렘린은 서방을 향해 더욱 공세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사실 푸틴과 크렘린 엘리트들은 이것이 공세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방어적인 행동이라고 믿었다. 근외 지역에 대한 통제력 확보를 넘어서,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끊임없이 메시지를 발산하는 서방 자체에 반격을 가하고 '복수'를 해야만 했다. 푸틴 입장에서는 그것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나 리비아가 되지 않는 유일한 길이었다.

266쪽

러시아는 세계관 전쟁을 어떻게 치러야 하는지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진행한 바 있었다. 그에 따르면 계몽주의 인식론의 기반, 즉 '사실에 기반한 객관적 분석'과 '자유로운 토론을 통한 여론의 수렴'을 허무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각종 가짜뉴스를 뿌리고, 객관적 사실 대신에 사람들이 믿고 싶어 하는 '대안적 진실'을 보여주면, 넘쳐나는 정보의 혼란 속에서 사람들은 길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스마트폰과 SNS의 시대에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은 객관적, 합리적 행동을 이끌어내기는커녕 오히려 서로 다른 진실을 믿는 집단들의 투쟁을 부추겼다. 그러한 부족 투쟁은 사람들이 정보의 홍수 속에서 정신을 유지하기 위한 새로운 시대의 방편이었다. 러시아의 사이버 전사들과 알고리즘이 파고든 것은 이 지점이었다.

295쪽

요즘은 역사가 다시 시작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로 인해 제기된 첨예한 쟁점에 대해서 자유주의의 반대자들이 자신들만의 답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그 답을 지지하는 이들은 늘어가고 있고, 그 견고함도 강화되고 있다. 따라서 자유주의를 지키기 위해 정말 필요한 태도는 '비난'이 아니라 '탐구'다.
(중략)
다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자유주의의라는 정체성에 몰입했다는 이유로, 다른 존재의 사고와 관념의 체계를 들여다보지도 않고 폄훼하는 것이야말로 자유주의의 수호라는 관점에서도 가장 위험한 일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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