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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박은정 역] 아연 소년들(2013)

독서일기/러시아

by 태즈매니언 2018. 9. 16.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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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해 알고 있었던 정보라고는 미국의 비엣남 전쟁처럼 구소련이 1980년대에 아프가니스탄의 친소정권을 옹호하느라 막대한 전비를 부담했고 결국 고르바초프가 취임한 이후에 철군했다는 정도였다. 상시적으로 10만명 이상의 소련 정규군이 10년  가까이 참전했고, 구소련군 1만 5천명, 반군 9만 명, 민간인이 150만 명 가까이 사망했는지 처음 알았다. 


<아연 소년들>이란 제목은 당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동원되었던 사병들 중에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십대 후반의 청소년들이 많았고, 이들이 사망할 경우 시신을 아연으로 된 금속관에 넣어서 운구했다는 데서 따왔다고 한다.


구소련의 공산주의 시스템의 비능률과 불합리함, 전쟁터의 잔혹함, 구호를 앞세운 침략전쟁의 무의미함과 귀환병들의 고통에 대해 우크라이나 출신의 저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채록한 인터뷰들을 정리한 책이고, 저자의 목소리는 절제되어 있다.


이하에서 인용하는 부분들 중에 읽는 사람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내용들이 많다는 점을 미리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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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쪽


한번은 아프가니스탄의 바그람 근교에서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청했어요. 그곳의 관습법에 따르면, 배가 고파 제집에 찾아온 사람을 그냥 돌려보내면 안 되거든요. 따뜻한 레표시카로 손님을 대접해야 하죠. 여자들이 우리를 식탁에 불러 앉히더니 먹을 걸 내왔어요. 

우리가 그 집을 떠나자 마을사람들이 그 집 여자들과 아이들을 돌로 치고 몽둥이로 두들겨 팼어요. 숨이 끊어질 때까지요. 그 여인들은 자기들이 죽임을 당할 걸 알았지만 우리를 내쫓지 않았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의 법을 따르도록 강요했죠. 모자를 쓴 채 모스크에 들어가기도 했고요.


115쪽


최근 9년 동안 우리 나라에선 새로운 의료용품을 하나도 만들지 않았어요. 붕대도 그대로, 부목도 옛날 그대로죠. 소련 병사는 세상에서 가장 비용이 적게 먹히는 병사에요. 참을성도 제일 많고 다루기도 수월하죠. 보급품도 못 받고 보호도 못 받는 병사. 일회용 소모품. 1941년에 딱 그랬어요. 그리고 50년이 흐른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왜죠?


130쪽


군사 작전 중에는 '고참병장'이 앞서가면서 우리를 보호했어요. 우리 목숨을 구해주었죠. 사실이에요. 병영으로 돌아오면 다시 "야, 애송이. 내 양말 한 번 핥아봐." 했지만요.


134쪽


영화에선 총탄이 머리에 박히면 양팔을 내저으며 픽 쓰러지잖아요. 하지만 실제로는 머리에 총탄이 박히면 뇌가 터져 공중으로 날아가고, 머리가 터진 사람은 그걸 잡겠다고 달려가죠. 한 500미터는 족히 달려요. 흩어진 뇌의 파편들을 붙잡기도 하고요. 


176쪽


숨을 거두고 십 분에서 십오 분 사이엔 눈을 감길 수 있어요. 하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너무 늦어요. 눈이 안 감겨지거든요.


211쪽


포로들을 붙잡아 데려와보면, 모두 힘든 노동으로 다져진 농사꾼 팔을 가진, 비쩍 마르고 지칠 대로 지친 사람들이었어요. 그런 사람들이 무슨 강도떼에요? 그냥 평범한 주민들이었다고요!


233쪽


타냐는 알코올을 마셨어요. 그것도 순수 알코올만. 

- 어떻게 그런 걸 마셔?

- 무슨 소리예요. 보드카는 너무 순해서 마셔도 취하질 않는다고요.


236쪽


"어쩌다 아프가니스탄에 오게 된 외국인이 건강하고 안전하게 그리고 온전한 정신으로 아프가니스탄을 벗어난다면...... 그는 특별한 하늘의 보호를 받은 것이다."(샤를 푸리에,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자)


270쪽


이웃집 여자가 타박을 하더군요. "몇천 루블이라도 모아서 뇌물을 좀 쓰지 그랬어?" 그 여자 말이 맞았어요. 누군가 뇌물을 써서 자기 아들을 빼냈고, 그 자리를 우리 아들이 채우게 됐거든요. 


368쪽


고등어 통조림이 나오기도 했어요. 하지만 네 사람당 한 개씩인데다, 통조림 깡통 표면에 '제조일 1956년, 유통기한 1년 6개월'이라는 숫자가 버젓이 박혀 있었죠. 아프간에서 지내는 1년 반 동안 딱 한 번, 부상을 당했을 때, 그때 한 번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더군요. 그때 빼고는 늘, 걸음을 옮겨놓을 때조차 머릿속에 먹을 생각뿐이었어요. '어디에 가야 먹을 것을 구하지? 아니면 훔쳐?'


372쪽


보통 집안을 뒤지려면 들어가기 전에 문을 열고 수류탄을 던져넣거든요. 언제 안에서 자동소총이 불을 뿜을지 모르니까요. 그게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수류탄을 터뜨리고 보는 이유죠. 아무튼 수류탄을 던지고 안으로 들어갔더니 여자들과 남자아이 둘, 그리고 젖먹이 아이가 죽어 있더군요. 갓난쟁이는 종이상자 같은 곳에 누워 있고... 유모차 대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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