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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러스/임상균 역] 브레이크 아웃 - 1950 겨울, 장진호 전투(2004)

독서일기/전쟁

by 태즈매니언 2015. 8. 4.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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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대통령이 대통령 당선자로 확정되고 며칠 후 멍한 상태에서 웹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흥남철수와 '메러디스 빅토리 호'에 대한 글을 읽었다. 그 이야기에 감동해서 그에 관련된 글을 찾아 읽었는데 역시 매혹적인 소재라 그런지 1년쯤 후에 공지영씨가 이 소재를 녹여서 <높고 푸른 사다리>를 썼더라. 


흥남 철수 일화때문에 한국전쟁에 대해서 관심이 생겨서 데이빗 헬버스탬이 쓴 <콜디스트 윈터>를 읽어보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 각국 정치가들, 맥아더나 리지웨이 같은 최고위 사령관들의 판단과 행동의 의미에 대해서 구체적인 정보와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해주는 좋은 책이었다. 다만, 정작 전투 자체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았던 점이 아쉬웠다.


며칠 전 어느 게시판 댓글이 장진호 전투를 다룬 이 책을 언급하고 있었다. <브레이크 아웃>을 쓴 마틴 러스는 뉴저지 출신으로 해병대원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었다. 이 책을 번역한 임상균씨도 전문번역가가 아니라 ROTC로 군대생활을 마치고 은행지점장으로 근무하던 이로, 이 책을 번역하기 전에는 10페이지가 넘는 글은 번역해본 적도 없었다는 분이다. 그런 분이 바쁜 생업과 병행해서 6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을 번역하신 것에 경의를 표한다.   


장진호 전투는 맥아더의 지시에 따라 북한으로 진격한 우측 주공 미10군단의 주축인 해병 1사단과 육군보병 7사단의 일부가 개마고원에 있는 장진호지역으로 진격하였다가 중공군 6개 사단의 침투식 공격으로 포위되어 전멸의 위기에서 극적으로 포위망을 돌파하여 흥남에서 해상으로 철수하였던 전투를 말한다. 이 전투는 독일과 소련사이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세계 양대 동계전투로 꼽힌다고 한다. 영하 35도의 혹한에 벌어진 전투였으니.


당시 한반도 좌측의 미8군단도 무너져서 후퇴하던 상황에서 10군단까지 무너졌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당시 제1해병사단이 중공군 9병단에 타격을 주지 못했더라면 주공인 13병단과 9병단이 합세하여 아군 재편성의 여유도 주지않고 곧바로 남진해왔을테니. 아마 37도선보다 더 남쪽으로 밀렸을지도 모른다. 이런걸 보면 김무성이 미국에 가서 큰절을 올릴 대상은 미국의 정치인이 아니라 장진호 전투 참전자들인 Chosin Few 였어야 했는데. 2차대전 참전 후 생업에 종사하다가 3주만에 소집되어 듣도보도 못한 나라로 실려온 예비역들과 18~20세의 앳된 나이의 청년들에게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미군의 막강한 보급, 아군 부상자 구호와 전사자 시신 후송에 부여하는 높은 우선순위 등 한국군과 대비되는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한겨울에는 몽골 대평원과도 별로 차이 나이 않은 혹한지대인 개마고원의 추위가 얼마나 가혹한 것이었는지도 구체적인 설명 하나하나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medic은 육군 의무병을 말하고 해병대에 배속된 해군의무병은 corpsman이라고 부른다는 것에서 스타크래프트를 떠올리며 잠시 갸우뚱 하기도.


폭발하는 수류탄을 자기 몸으로 막아 동료들을 살렸던 윌리엄 B. 보 일병의 여동생이 1984년 9월 22일 해군 수송함 윌리엄 B. 보호의 명명식에서 삼페인 병을 깨는 전통적 행사를 주관했다 이야기, 최초의 아프리카계 해군비행사로 장진호 전투에서 격추되어 사망한 제스 브라운의 이름을 따라 명명된 녹스급 호위구축함 제스 브라운 호와 같이 참전영웅들을 기리는 문화 자체가 부럽기도 했다. 이 책 말미에 수록된 20페이지 가량인 색인을 읽어나가며 참전용사들의 이름을 짚어나가며 책을 덮었다.   


해병대의 표어는 '항상 충성을'이란 뜻의 라틴어 'Semper Fidels'라는데 과연 평소 국방비 빼먹는데 열올리는 군인들과 거들먹거리던 기득권층부터 앞다퉈 도망가기 바쁜 헬조선이 충성을 마칠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이런 상황에서 과연 다음과 같은 패기를 바라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지 의문이다. "후퇴라니!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공격중이야." - 제1해병 사단장 올리버 P. 스미스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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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쪽


피란민들 중에는 민간인으로 가장하고 그 지역을 통과하려는 놀랄 만큼 많은 숫자의 북한군 군인들이 있었다. 성인 남자를 검문하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었는데, 머리를 짧게 깎고 있거나, 북한군 정규복장의 상의에 있는 V자 칼라에 따라 목이 햇볕에 그을려 있거나, 또는 군화를 신고 장거리 행군을 하여 발에 굳은 살이 박혀있으면 그 자리에서 체포하여 학교건물 옆에 세운 영창에 가두었다. 


80쪽


"전사자의 이름, 계급, 군번을 작은 공책에 기입하고는 배낭과 호주머니를 뒤져 편지나 개인 소지품을 찾았습니다. 어떤 때는 폭발로 인식표가 날아가 버렸거나, 편지도 없거나, 전사자가 보충병이었기에 주위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전사자의 지문을 채취해서 본부로 돌아와 그 지문을 기록과 대조해 보고, 주소지를 확인한 뒤 전사통지를 누구에게 해야하는지를 결정했죠."



104쪽


그해 가을 송 장군의 제9병단은 한반도 서북부에서 미8군과 대치한 제13병단에 측면방어를 제공하고, 장진호 부근에서 미10군단 예하의 해벙 1사단과 다른 부대들을 격멸하라는 이중임무를 부여받았다. "지연전에 관하여"란 논문에서 마오쩌둥은 우리가 항상 적을 깊숙하게 끌어들이려 하는 정책을 주장하는 이유는 그것이 강력한 적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전술이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미10군단을 험준한 산악지대로 끌어들이는 것이 한반도 동북부에 있어 송장군이 세운 전략의 핵심 성공요건이었다. 


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은 육군이 보급품을 지켜줄 거라고 안심시켰지만, 육군의 임무수행능력에 의구심을 품고 있었던 스미스 장군은 진흥리에 수비대를 남겨놓고, 도 7연대가 북쪽을 향한 진격을 재개하자 고토리에도 따로 수비대를 배치했다. 그는 보급의 측면에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병력을 겨울전투에 투입시키고 싶지 않았고, 10군단 지휘부의 비현실적 요구사항에 직면하여 해병대의 진격속도를 거의 명령불복종에 가까울 정도로 지연시켰다. 


213쪽


겅호(Gung-ho)는 중일전쟁 때 팔로군이 쓰던 한자어인 '공화(共和)'에서 유래한 말로, '함께 잘하자'라는 뜻이다. 태평양전쟁 때 에반스 칼슨이 미 해병 제2기습특공대의 전투구호로 채택하여 퍼지게 되었다.


225쪽


고지 아래로 탄약을 구하러 보내졌던 소위는 결코 돌아오지 않았고, 그런 겁쟁이들은 전쟁영웅들과 함께 영원히 기억되었다. 그들은 각종 회의에서 자주 언급되었고, 참전자들은 그들의 동료가 전투현장에서 보여준 연약함에 대해 아직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하지만 그들의 사생활은 철저히 보호되었는데, 이름이 외부인이 있는 자리에서는 결코 언급되지 않았고, 면전에서 경멸이나 반감을 거의 표시하지도 않았다. 만약 어떤 감정을 나타내는 경우라면, 그것은 그 겁쟁이가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 할 부끄러움을 이해하는 데서 오는 연민이었다. 


239쪽


군의관 리트빈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격렬한 전투 중에 땀을 흘리지 않는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였지만, 모두들 땀을 흘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요. 왜냐하면 땀이 얼어 발과 양말 사이에 얇은 얼음막을 형성하기 대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군화를 자주 털지 않거나, 발을 주물러주지 않거나, 양말을 갈아 신지 않으면 십중팔구 동상에 걸리기 마련이었죠."


5연대 의무대장이었던 체스터 레슨덴 해군소령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용해가 안되고,  수혈관이 얼음조각 때문에 막혀서 혈장을 사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붕대를 갈지도 못했는데, 붕대를 갈기 위해 장갑을 벗으면 손이 바로 동상에 걸리기 때문이죠. 상처부위를 살펴보기 위해 부상자의 옷을 자를 수도 없었습니다. 왜나하면 바로 몸이 얼어버리기 때문이었죠. 부상자를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더 나을 때도 있었습니다. 한 가지 긍정적인 점은 추위 때문에 지혈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외에는 모든 것이 최악이었죠. 부상자를 침낭에 쑤셔 넣으려 해본 적이 있습니까?"


241쪽


그 날 아침 차갑기 그지 없는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에 숨어서 해병들은 얼어서 아무 느낌이 없는 손으로 M-1 소총, 카빈 소총, 브라우닝 자동소총과 기관총을 분해해서 추위 때문에 응고된 총기윤활유 찌꺼기를 닦아냈다. 소화기 중에서 카빈 소총이 가장 성능에 문제가 있었는데, 약실의 가스압력이 추위 때문에 너무 약해져서 신중한 성격의 해병들은 카빈 소총을 구호소 밖에 쌓여 있는 M-1 소총과 바꾸었다. 


모든 무기가 추위 때문에 성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수류탄은 잘 터지지 않았고, 중기관총 총열의 냉각통에는 부동액을 채워야 했다. 또 경기관총은 얼어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목표물이 있건 없건 몇 분 간격으로 사격을 계속해야 했다. 박격포는 사격시 반발력으로 포판이 깨지는 경우를 제외하고 제대로 성능을 발휘했지만, 포병화력은 추위 때문에 정상수준을 밑돌았는데, 매번 포사격 후 곡사포 포신이 다음 사격을 위해 포사격 우치로 돌아가는 데 길게는 30초 이상 걸렸기 대문이었다. 


따뜻한 텐트 안에서는 눈을 녹인 물을 석유난로에 끓여서 꽁꽁 언 C-레이션을 끓는 물 안에 던져 넣었지만, 대부분 바깥쪽만 녹아서 얼어 있는 안쪽까지 먹어치운 해병들은 심한 장염과 설사를 겪어야만 했다. 


268쪽


"장진호 전투에 대해 언급할 때 가장 중요한 사장은, 사단이 살아나올 수 있었던 것은 스미스 장군의 선견지명 덕택이었다고 하는 겁니다. 만약 3개 보병 연대가 알몬드 장군이 원했던 것처럼 서로 떨어져 진격했더라면, 사단은 아마 연대별로 각개격파 당했을 겁니다. 하갈우리에 충분한 양의 탄약과 필수보급품을 비축해 놓은 것도 스미스 장군의 선견지명 덕이었을 뿐만 아니라, 야전 활주로 건설은 전적으로 그의 제안이었지요."


297쪽


과달카날 전투의 참전용사인 앨런 해링턴 상병은 피셔 중대의 기관총반 반장이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 나는 다르라는 이름의 신병이 겁에 질려 있는 것을 알아챘는데, 그 친구는 우리 반에 바로 전에 배속되었고, 전투경험이 전혀 없었습니다. 만약 중공군이 나타나기 전에 시간이 있다면 얘기를 몇 마디 나누어 안정시켜 주려고 했는데, 갑자기 그가 나에게 두려워 죽겠으며 어쩔 줄 모르겠다고 말하더군요. 나는 우리 모두 예외 없이 닥쳐올 전투를 두려워하며, 단지 누군가는 다른 사람들보다 그 두려움에 잘 대처한다는 것이 다른 점일 뿐이라고 말해 주었지요. 전투원은 연극에서 자기 순서를 기다리는 배우와 같으며, 배우는 무대공포증에 걸려서 안절부절 못하다가도 자기 순서를 알려주는 신호를 듣고 무대에 서면 그런 증세가 다 없어지는데, 자기가 연습해 온 역을 연기하느라 바빠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어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너도 전투를 위해 훈련을 받았다고 말했지요. 패리스 아일랜드의 교관들이 심하게 군 것도 이런 순간을 위해서였으며, 네가 만야 ㄱ두려움에 떨며 모든 것을 포기하려 한다면, 전우들이 너를 필요로 하는 여기 전쟁터가 아니라 신병훈련소에서부터 포기했어야 한다고 충고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친구가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자기 참호로 돌아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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