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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정] 아편과 깡통의 궁전(2019)

독서일기/남아시아

by 태즈매니언 2020. 1. 12.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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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쓴 이런 주제에 대한 단행본도 나오다니 과연 한국이 제국의 모습을 갖춰가고 있구나.

 

2013년에 나온 저자의 학위논문 <아편, 주석, 고무: 페낭 화인사회의 형성과 전개, 1786~1941>을 바탕으로 충실한 설명을 덧붙인 덕분에 동남아시아에 대한 내 무지함을 덜 수 있었다.

 

예전 아시아나항공에 다닐 때 페낭 섬에 화물기가 취항해서 산업단지에서 제조된 삼성과 델 노트북들을 미국으로 실어날랐던 운송장을 자주 봤던 기억이 난다.

 

그 때는 왜 페낭이 말레이 화교들의 중심지가 되었는지 전혀 몰랐는데 아편과 주석, 고무 교역과 쿨리들이 만들어낸 도시였구나. 법제도가 뒷받침되지 않은 상황에서 허울뿐인 계약노동자라는 신분이 노예보다 낫다고 보기 어렵다. ㅠ.ㅠ

 

싱가폴을 만든 래플스가 페낭지사의 비서관으로 6년을 근무한 경험이 있었다는 것도 몰랐네.

 

서양에서 대항해시대 때 포르투갈이 처음으로 고안해낸 '상관(商館:Factory)'이라는 발명품 만큼이나 중국 복건성과 광동성 출신 화인들이 페낭에서 구축한 혈연과 지연으로 묶인 화인사회조직 '콩시'도 효율적으로 작동한 체제였던 것 같다.

 

자유방임 자본주의의 실험 사례를 보고싶다거나 페낭을 여행하실 계획이 있으시면 읽어보시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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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쪽

 

(페낭이 위치한) 커다 해안은 인도에서 출발하는 범선의 첫 기착지였고, 수마트라 북동안과 버마 남부, 태국 남서부해안을 잇는 교역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이들 말라카해협 북부 지역의 사람들은 바다와 무역풍의 영향으로 생활방식이나 경제적으로 긴밀했다. 18세기 후반 인도의 식민지배를 굳힌 영국은 인도의 아편과 중국의 차를 교역하는 영국 무역선이 배를 보수하고 보급품도 조달받을 항구가 절실해졌다. 인도-중국 항로의 범선들은 인도 동부 코로만델 해안에서 남서풍을 타고 북상해 커다 해안 일대에서 바람이 북서풍으로 바뀌면 중국으로 향했다.

 

42쪽

 

페낭을 시작으로 싱가포르, 홍콩으로 이어지는 영국의 식민지 확대는 지리적 이점을 지닌 섬은 확보하고 아시아 사람들을 식민하는 방식을 취했다. 영국은 기존 현지 정치권력과의 마찰을 피하면서 전략적 상업적 이해를 동시에 추구했던 것이다. 무관세로 선박과 상인의 자유로운 항구 출입을 보장하고, 인구가 희박한 섬에 아시아계를 식민하는 영국의 자유무역 체제는 19세기 싱가포르와 홍콩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하지만 영국이 동아시아에서 자유무역 체제를 처음으로 실험한 곳은 페낭이었다.

 

160쪽

 

아편팜은 쿨리가 빚진 뱃삯을 계약 기간 내에 갚지 못하게 함으로써 농장이든 광산이든 일터를 자유롭게 떠나지 못하게 하는 족쇄였다. 영국은 식민지 발전은 물론 화인사회의 번영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아편팜을 옹호했다. 식민 당국은 본질적으로 독점적인 아편 도매업자였기 때문이다. 페낭은 건설 초기부터 '아편 권하는 사회'였다. 19세기 중반까지 금의환향까지는 아니더라도 목숨을 부지해 얼마간의 돈을 모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중국인 쿨리는 열 명 중 한 명에 불과했다.

(중략)

페낭의 중국인 농장주들은 쿨리를 임금노동자로 고용하고 아편팜과 비밀결사를 이용해 이들에게 비싼 값에 아편을 팔아 지급한 임금을 되가져가는 수법으로 노동을 통제했고 자본을 키웠다.

 

326쪽

 

1912년 해협식민지 당국은 중국인 쿨리의 말레이반도 유이을 통제했고, 1928년에는 이민규제령을 통해 중국인의 해협식민지 이주도 제한했다. 이로서 1907년에서 1938년까지 말레이반도 전역의 다양한 농원에서 인도인 노동자의 비중은 73.7%로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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