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만 보면 건축업계 종사자가 고발하는 인허가관청, 예산, 시행사, 시공사, 감리 등 건축물이 세워지는 과정에 관여한 나쁜 놈들 대잔치 느낌이지만 내용은 그것과 전혀 거리가 멀다.
<사이언스 앤 더 시티>가 현대 대도시를 가능하게 만든 최신의 공학적인 기술을 소개하고 있는데 반해, 이 책은 안전한 건물을 짓고 유지하기 위한 기본적인 구조역학 지식을 비전공자의 눈높이에 맞춰 소개한다. 동역학(dynamics)과 정역학(statics)이 뭔지도 모른 무식한 문돌이였지만 많이 배웠다.
함인선 건축사님은 건축물이 무너지는 원인을 '중력', '진동', '변형', '바람', '물', '불', '흙'의 일곱 자연요소로 정리하고, 이들 자연요소를 각각 세 가지 유형별로 나누어서 대표적인 건물이나 토목시설의 붕괴 사례들을 들어가며 설명하고 있다. 항공기 충돌로 무너진 WTC,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사례에 대한 내용이 특히 인상깊었다.
예전의 나는 건축을 미학과 예술의 관점으로 봤었다. 그런데 페북에서 건설인프라 엔지니어 양동신님과 엘리펀츠 건축사사무소 이양재 건축사님의 글들을 보면서 엔지니어링과 시공성의 관점에서 인식하게 되었다. 위의 두 분이 글과 만화에서 강조하신 것처럼 함인선 건축사님은 이 책에서 "건축/토목 현장은 아직 충분히 근대화되어 있지 않고, 건축가는 기본적으로 엔지니어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지난 1만 년간 인류가 성취한 건축의 역사의 거의 대부분이 돌과 나무, 흙이라는 재료로 구조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투쟁이었다는 점을 이해하니, 산업혁명 이후 제철소에서 대량생산된 강철이 구조재로 새롭게 등장한 사건의 의미를 조금은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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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쪽
한 시대 건조물의 안전율을 정하는 것은 사회적 약속으로 이루어진다. 안전율은 당대의 목숨 값어치와 건설비용과의 함수이기 때문에 주관적이며 동시에 가치 지향적이다. 무한한 안전이란 가능하지도 타당하지도 않으므로 안전율은 '적정 수준의 사고'가 일어날 확률에 의해 결정된다. 여기서의 '적정'이란 그 사회가 심리적, 경제적으로 용납할 수 있는 정도를 뜻한다.
29쪽
소득수준 반영 산재사망률을 세계 각국과 비교해보면 더 기가 막히다. 우리나라가 1위임은 말할 것도 없고 2위 캐나다의 3배이고, 13위 영국에 비해서는 무려 26.3배이다(이규진, 2014). 건설현장 사고가 전체 산재의 절반이니 이것이 곧 규모를 막론하고 우리나라 건설현장의 실상이기도 하다.
(중략)
9인 이하 건설현장의 재해율은 대규모 현장의 86배라는 통계도 있다. 더욱이 이들은 현장의 안전비용은 물론 직접비용까지 침범할 유혹을 받으며 실제로 그렇게 한다.
69쪽
1m 정도 눈이 쌓이면 무게는 제곱미터당 150kg 정도이나 물기를 많이 머금은 습설인 경우 이보다 2~3배까지도 나간다. 비닐하우스는 30cm 정도 쌓이면 무너지고, 슬레이트 지붕도 1m면 붕괴한다. 경주 코오롱마우나오션 리조트 체육관의 경우 설계하중이 제곱미터당 112kg이었으니 습설이 50cm 쌓였다면 당연히 무너지게 되어있었다.
102쪽
(준공 일주일 전인 2014. 5. 13. 기울어진) 충남 아산 오피스텔의 시공자는 건축주이기도 한 한모씨다. 개발업을 하는 사람으로 건설업 면허를 대여해서 직접 시공했다. 그러니 알아서 빼먹은 것이다. 설계자인 D 건축사사무소는 설계, 감리를 묶어 수주했으나 현장 감리는 나가본 적이 없었단다. 감리나갈 돈을 받지도 않았고 나가보아야 건축주가 말을 들을 리도 없었기 때문이다. 고발하면 되지만 그러면 지역사회에서 추방이다.
204쪽
'파괴(failure)'는 '붕괴(collapse)'와는 다른 개념이다. 구조 시스템 전체의 기하 구조가 와해되는 것이 붕괴라면 파괴는 구조 시스템을 구성하는 부재 중에서 절단 등이 일어난 것을 지칭한다. 파괴가 붕괴로 이어질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예컨대 구조 시스템 여러 절점에서 파괴가 일어나 '불안정 구조(unstable structure)'가 되면 붕괴까지 도달한다. 앞에서 폭파해체 공법을 설명하며 언급한 바 있다. 그러므로 구조 시스템은 시스템을 이루는 각각의 부재와 절점, 지점 등이 충분히 튼튼하여 파괴에 이르지 않음으로써 전체 골격이 붕괴되지 않고 원래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264쪽
파리의 에펠탑은 백 년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잘 버티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 역시 마찬가지다. 철 구조물이지만 피막 도장을 꼼꼼히 해주기 때문이다. 금문교는 전 구간에 페인트 칠을 하는데 14년이 걸리기 때문에 앞 팀이 3분의 1 지점에 도달하면 뒤 팀이 출발해야 한다. 지난 80년간 유지비용이 건설비의 3배, 매년 4%가 들었다 한다. 성수대교는 유지관리 비용으로 매년 0.67%를 썼다니 왜 일찍 그 꼴이 되었는지 알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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