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꼭 읽어야 하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종이에 새겨진 활자마다 꾹꾹 담겨있을 감정들을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고, 아마 읽고서도 안희정씨와 동조자들의 행위에 분노하고 며칠 지나면 잊어버릴텐데 괜히 나는 저렇지 않다는 알량한 우월의식만 장착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도 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보게 된 것은 두 가지 이유때문이었다. 첫째, 안희정씨를 괜찮은 대통령 후보로 생각했고, 실제로 그와 잠깐 대화를 나눠봤다고 좋은 이미지를 전파했던 입장에서 지난 2018년 3월의 고발 이후 2년 반 동안 정상적인 생활을 전혀 못하고 재판에 매달려 살아왔던 저자의 책을 외면하는 건 염치가 없었다.
둘째, 직장생활 경험이 꽤 있는 30대 여성이 왜 수 회의 성폭행을 꾹꾹 견디며 수행비서일을 했는지 납득하기 어려웠기에 의구심을 풀고 싶었다.
이 책을 읽으며 '유력정치인의 수행비서'가 보스와 어떤 관계에서 일하고, 수행비서라는 업무와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려는 보좌집단 내부의 조직문화와 동조압력이 얼마나 심했는지 김지은님의 회고를 듣다보니 둘째 이유에 대한 의구심이 완전히 해소되었다.
<승자의 뇌>에서 서술한 것처럼 성공을 하고 권력을 쥐면 마약처럼 뇌의 호르몬 분비가 바뀌고 충동과 의지의 좌절을 점점 더 참기 어려워지기 때문에 왕관을 쓰는 자들은 그 무게를 감당할 능력이 있어야겠다. 그런데 애초에 정치를 업으로 삼는 남자 중에 우두머리 수컷의 충동을 가진 사람 비율이 사회평균보다 높을 수밖에 없으니.
김지은님이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일상생활로 복귀하길, 일자리와 노동능력을 상실하게 만든 안희정씨와 충청남도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도 조속히 승소하길 기원한다. 그녀가 겪었던 고통과 30대 초반에 상실한 노동능력에 비하면 3억 원의 청구금액이 많다고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안희정씨의 참모집단 소속이었으면서 불이익을 감수하고 용기있게 증언한 전임 수행비서 신용우님과 신임을 받는 고위 참모였음에도 김지은님의 편에 서서 사건을 고발할 용기를 준 '문 선배'와 같은 분들을 기억하자.
--------------------------------------------------
129쪽
최고 권력자의 심기와 이미지 관리를 위한 그 논의와 결정들 속에서 피해자는 애초 고려 항목에 있지도 않았다. 사건 관련자들은 하나의 객체이자, 어디로 옮겨 붙을지 모를 불씨였다. 오직 그것을 조용히 끄는 데에 모두의 관심이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인생과 생계가 달린 일이었음에도 그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
(중략)
도청 성희롱 사건에 대한 깊이 있는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바로 이어진 화제는 안희정이 스위스 다보스포럼으로 출국할 때 공항패션으로 사진 기사를 한번 내는 게 어떻겠냐는 주제였다. 토론은 활발히 이어졌다.
168쪽
모든 것이 끝나고 마음이 추슬러지면 정식으로 항의하고 싶었다. 어떻게 피해자도 받지 못한 판결문 전문을 단독 입수하게 되었는지, 왜 개인정보 보호도 없이 공개했는지 묻고 싶다. 왜 법원은 이것을 정식 절차를 거치지 않고 외부에 주었는지, 왜 실명 버전을 주었는지, 성폭력 사건의 판결문이 단독 입수되고 외부로 노출되어 버젓이 기사화되는데도 왜 어느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는지 묻고 싶다. 피해자가 겪을 모욕과 고통은 아무도 고려하지 않았다.
207쪽
(피해자를 위해 증언한 정연실님) "피해자의 곁에 서기로 결심한 이유 중에 하나는 일단 쪽팔렸다. 너무 창피했다. 나를 아는 사람 중에 내가 안희정 밑에서 일하는 거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사건이 터지고 나니까 다들 나한테 말을 못 건다. 내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서. 그러니까 혹시라도 피해자 편에 서 있지 않을까 봐. 다들 말을 말을 못 하고 있었다. 다른 헛소리를 듣고 싶지도 않았다.
221쪽
(피해자의 일기 중) 성폭력 기사만 봐도 내 얘기가 아닐까 심장이 쿵쾅거리고, 다른 뉴스에 사건을 연상시키는 말들, 충남도청, 민주당, 국회의원, 도지사, 러시아, 스위스, 미투 등이 나오면 나는 불안에 휩싸인다. 연쇄 작용이라는 것은 놀랍다. 찰나에 순간이동을 해 나는 다시 한 번 사건을 경험한다. 어느 때는 내 심장이 콩콩콩 뛰는 것조차도 아프고 저리다. 마음의 병이 몸의 병이 된 것 같다.
[박창진] 플라이 백(2019) (0) | 2020.10.23 |
---|---|
[최지은] 엄마는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2020) (0) | 2020.09.30 |
[금정연] 실패를 모르는 멋진 문장들(2017) (0) | 2020.09.11 |
[노석미] 매우 초록(2019) (0) | 2020.08.25 |
[장강명] 당선, 합격, 계급(2018) (0) | 2020.08.09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