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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올해의 책들

독서일기/올해의 책들

by 태즈매니언 2020. 12. 31.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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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살만한 사람들이 징징거리는 목소리가 과하게 울려퍼지는게 한국사회의 문제라는 페친님 말에 공감합니다. 올 한 해 가족들 모두 무탈했고, 적어도 제 급여는 꼬박꼬박 나왔고 몸도 아프지 않고 별다른 봉변을 겪지도 않았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에 코로나시대에 다시 찾아온 <화양연화 리마스터드>를 봤더니 마음이 촉촉해지네요.

 

제 앞가림만 잘 하면, 취향에 맞는 편안한 공간에서 생활독서를 할 수 있었던 덕분에 올해도 좋은 책들을 많이 읽었습니다.

 

저는 페친들께서 추천해주시는 책들을 많이 보다보니 신간서적은 많지 않습니다만 올해 제가 만난 책이라 '2020년 올해의 책'으로 정리해 봅니다. 논픽션-픽션으로만 구분했고 제가 읽을 날짜 순서입니다. 괄호안의 연도는 원서가 출판된 해입니다.

 

1. 강희정, <아편과 깡통의 궁전>(2019)

 

저는 박사학위도 없는 사람이지만 인문사회계열의 박사학위 논문은 학계 동료들에게 연구자의 자격을 인정받는 것도 있지만 그 주제에 대해서는 대중에게 어느 누구보다 잘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13년에 나온 저자의 학위논문 <아편, 주석, 고무: 페낭 화인사회의 형성과 전개, 1786~1941>를 바탕으로 쓴 이 페낭 효과사회에 대한 교양서는 한국의 인문사회계도 이제 제국과 같은 성취를 달성할 수 있다는 희망의 증거였습니다.

 

2. 테오도르 카진스키, <산업사회와 그 미래>(1995)

 

임명묵님 덕분에 알게 되어 1월과 10월에 각각 서평을 썼던 책입니다. '테크놀로지는 자유에의 열망보다 더 강력한 힘'이라는 유나바머의 통찰이 전체주의 혹은 테크플랫폼들에 의해 개인들이 파편화되고, 개인의 선택에 따른 행동과 공론장 형성이라는 자유주의의 토대가 무너져가는 상황에서 140쪽 남짓한 25년전의 디스토피아 예언서가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3. 정혜진, <변론을 시작하겠습니다>(2019)

 

국선전담변호사로 10년간 활동해온 기자 출신 변호사님이 형사사건에서 만나고 변호했던 사람들을 통해 느낀 소회를 정리한 책인데, 법조인이 쓴 에세이 중에서 이렇게 자의식이 절제된 담담한 책은 못봤습니다. 먹고살만한 사람들은 별로 마주칠 일이 없는 어려운 사람들, 아픈 사람들의 모습을 접해보기 좋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변호사의 생활이 담겨있는데, 이런 생활을 유지하는 마음수양을 본받고 싶습니다.

 

4. 로리 윙클리스, <사이언스 앤 더 시티>(2016)

 

현대인, 특히 우리나라의 도시화율은 2019년 기준으로 91.8%입니다. 서울은 이미 세계적인 메갈로폴리스고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 특히 식자층이라고 발언의 영향력이 큰 사람들이 이러한 현대의 대도시들을 유지하게 해주는 공학기술들에 너무 무지하다고 느꼈습니다. 이용만 하면 되는 것이고, 과연 몰라도 되는 지식일까요? 글레이저의 <도시의 승리>, 양동신님의 <아파트가 어때서>와 같이 보면 더 좋습니다.

 

5. 로버트 카플란, <타타르로 가는 길>(2000)

 

국제정치에 대한 책들을 여러 권 봤지만 로버트 카플란처럼 통찰력있는 분은 못봤습니다. 카플란이 무려 20년 전에 중근동과 동유럽을 취재하고 통찰했던 바가 지금의 이 지역의 문법으로 여전히 유효합니다. 에너지와 민족문제의 복잡한 지정학이 담겨있는 책이라 배경지식이 좀 필요한데, 작년에 박정욱님의 <중동은 왜 싸우는가>를 먼저 읽었던 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6. 함인선, <건물이 무너지는 21가지 이유>(2018)

 

올해 함인선 건축사님의 책을 여러 권 읽었는데 일단 내용이 알찹니다. 전문직 업계에서 인정받는 베터랑이면서 건축설계사무소라는 본업 외에 민간회사의 사장, 교수는 물론 새건축사협의회라는 대안단체까지 운영해보신 이런 분이 변호사 업계에 과연 있을까요? 시절을 잘 타고나서 겉보기 경력만 화려한 쭉정이들이 업계 원로 대우를 받고 하나마나한 소리들만 떠들고 다녀서 전문직 망신만 시키고 다니는 노인네들이 넘쳐나는 꼴에 염증이 났던 차에 인상깊었습니다

 

7. 한승혜,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2020)

 

면식이 있는 페친의 책은 올해의 책으로 추천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이 책을 빼놓을 수 없네요. '주례사 비평'이라는 조롱 표현이 나온지가 20년이 넘었는데도 출판사의 판매용 홍보서평이나 독자들의 감상문이 아닌 '서평'은 여전히 취약하다. 한승혜님은 상업 베스트셀러를 아예 없는 것처럼 취급하는 고고한 문학평론가들과, 출판시장이 불황이라고 우는 소리만 하면서 독자를 후킹하는 책을 만들기 바쁜 출판인들에게 서평은 이런 것이라는 시범을 보여줍니다. 독서를 처음 시작하는 이들을 위한 가이드북으로 추천하고 싶습니다.

 

8. 존 파워스-왕가위, <왕가위 WKW>(2016)

 

1998년 일본문화가 개방되기 전에 지방의 청소년인 제가 접할 수 있는 아시아의 현대는 홍콩이었습니다. 홍콩영화가 제 또래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 이유죠. 저는 그 중에서도 왕가위 감독의 영화들을 참 좋아하는데, 왕가위 감독은 선글래스를 벗은 사진도 없고, 사생활에 대해 전혀 노출을 안하는 사람이라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영화평론가 존 파워스가 왕가위 감독을 여섯 번 인터뷰하고 정리한 이 책덕분에 왕가위 감독이 어떤 사람이고 그가 영화를 어떻게 찍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책값이 비싸지만 판형도 크고 컬러사진이 많아서 비싸다고 할 수 없는 책입니다.

 

9. 매슈 워커, <우리는 왜 잠을 자야 할까>(2017)

 

수면의학과 뇌과학의 성과들을 정리해서 8시간의 충분한 잠이 왜 중요한지 깨닫게 해주는 책입니다. 어차피 죽으면 영원히 잘텐데 싶어 잠자는 시간을 아까워 했는데, 그런 행동이 얼마나 바보같은 짓이었는지 배웠습니다. 실제로 이 책을 보고나서 의식적으로 충분한 수면시간을 확보하고 있는데, 덕분에 의사결정의 질이 훨씬 좋아졌습니다.

 

10. 김지은, <김지은입니다>(2020)

 

안읽어도 알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안희정씨 사건 때 제가 한 가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이 왜 석사학위도 있고 직장생활을 여러 곳에서 해본 30대 중반의 여성, 특히 지지하는 사람도 거의 없는 상황에서 오롯한 개인적인 결단이 필요한 어른의 경험인 이혼도 해봤던 사람이 안희정씨에게 제대로 의사를 밝히고 거부하지 못했나? 였습니다. 그래서 읽었지요. 그 의문은 읽으면서 바로 풀렸습니다. 그런데 성폭력 범죄의 피해자가 어떻게 힘든지, 끝까지 싸우는 지난한 과정에서 어떤 말과 행동이 힘이 되고 상처가 되는지 자세히 밝히고 있어서 남자들이 꼭 읽어보길 권하고 싶습니다. 40대 이상이라면 특히요.

 

11. 풀러 토리, <뇌의 진화, 신의 출현>(2017)

 

유인원과 고인류가 지능의 진화를 통해서 어떻게 자아를 인식하게 되었고, 마음이론과 시간의 축에서 자신을 과거와 미래를 현재와 연결짓는 자전적 기억으로 인해 신과 종교가 어떻게 태동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책인데, 믿음이나 기적 없이도 신과 종교의 출현과 그 기능을 깔끔하게 잘 설명하고 있어서 무신론자나 무신론자를 이해하고 싶은 신자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입니다.

 

12. 테드 창, <숨>(2019)

 

장인정신으로 작품을 드물에 내놓는 하드SF 작가 테드 창의 작품집니다. 중단편 하나하나에 과학적으로 추론한 하나의 세계관이 담겨있죠.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것처럼 테드 창도 노벨문학상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13. 마쓰이에 마사시, <여름은 오래 그 곳에 남아>(2012)

 

전통과 현대의 엔지니어링을 접목한 건축과 조경을 좋아하다보니 일본의 건축가들에게 매료되었는데, 일본의 건축가 요시무라 준조를 모델로 해서 쓴 소설인데, 그래서인지 남들은 그냥 괜찮은 소설이라고 평할 수도 있는 이 작품이 각별하게 느껴졌다.

"신앙을 갖지 않은 건축가가 그 경험과 기술을 아낌없이 쏟아부은 교회에는 기도와도 같은 것이 형태가 되어 나타나 있었다. 그 형태는 여기에 모이는 사람들을 내부로부터 진정시키고, 혹은 격려하고 움직일 것이다."(77쪽에서 인용)

 

14. 김혜진, <딸에 대하여>(2017)

 

아들.. 그 중에서도 맏아들로 살아왔고, 딩크로 살기를 선택했기에 저는 짐작하기도 어려운, 딸을 둔 어머니가 주인공인 소설. 누군가를 이해하는데 들일 시간과 기운이 충분치 않고, 오래 살아왔지만 경제적 자유를 얻지 못한 처지때문에 적당히 속물적인, 자기 자식의 문제에서는 맹목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인간에 대한 존중과 애정을 지켜나가는 중년의 한 어머니의 모습을 섬세하게 담았다. 김혜진 작가의 소설을 더 찾아 읽어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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