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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에셀/목수정 역] 멈추지 말고 진보하라(2013)

독서일기/에세이(외국)

by 태즈매니언 2014. 2. 11.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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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적 합리주의로 무장한 서구의 지성이 '제행무상'과 '제법무아' '연기' 등 불교철학에 대해 보이는 높은 이해도와 공감이 신기했었던 책. 그런데 이 책에서 언급된 유럽의 지성들과 그들의 저작들을 접한 적이 없어서 전달의 폭은 좀 제한되더라. 시낭송에 대해서 경외하는 수준인데 시낭송에서 감동을 받아보지 못한 내게는 그 느낌이 전해지지도 않고. 

사상과 신념에 대한 부분들보다도 굳이 남들에게 밝히지 않아도 되었을 개인의 사랑부분이 인상깊었다. 17살 무렵 나이가 두 배가 넘는 유부녀와의 첫사랑, 결혼생활과 혼외관계, 60이 넘어서 아내가 사망한 후 내연녀와 재혼해서 평생을 행복하게 살았던 모습.. 전혼의 아내가 자신의 친구와 썸씽이 있었는데도 쿨하게 눈감아주고 그 친구와 평생 친하게 지내는 모습 등 에피소드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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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쪽

어떤 이들에게는 사랑하는 것이 사랑받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그럴 때 열정이 맹위를 떨칠 수 있다. 우리는 결코 충분히 사랑하지 못한다. 특히 충분히 '잘' 사랑하지 못한다. 하지만 내 삶의 단계들에 잊히지 않는 흔적을 남긴 것은 사랑받았던 기억보다 사랑했던 기억이었다. 

122쪽

근본적으로 인간들은 모두 어딘가 보잘것 없는 측면을 갖고 있다.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보잘 것 없는 측면을 찾아내려 든다면, 그건 별로 유쾌하지 않다. 반대로 감탄할 만한 측면을 충분히 칭찬하고 누린 다음 시시한 면들을 발견한다면, 모두에게 더 큰 활력이 되지 않을까?

153쪽

예를 들어 조국에서 추방당해 프랑스로 망명한 시오랑은 모든 종류의 국적을 거부하고 언어에 천착했다. "우리는 한 국가에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한 언어를 통해 살아간다. 조국은 바로 언어다. 다른 그 무엇도 아니다." 나는 세 언어를 통해 그만큼의 조국을 선택한 셈이다. 게다가 이 세 언어 중 두 언어, 아니, 어쩌면 세 언어 모두 국제어이기 때문에, 나의 소속감은 하나의 국가 공동체를 넘어선다. 

162쪽

어느 날 장 뽈 돌레와 나눈 대화에서 이런 결론에 도달했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결국 좋은 인생이란 우리가 축적해온 그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믿음을 갖는 인생이라고. 그리고 이 믿음은 시적 상상력이 우리를 풍부하게 지탱해줄 때 훨씬 더 강해진다고. 살면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일들, 그리고 너무나도 지겨울 때가 있는 일상 옆에는 얹나 예술이라는, 시라는 피난처가 있다. 

180쪽

우리 늙은이들이 여러분에게 참여하라고 요구할 때, 나는 우선 우리 사회의 작동방식을 통해 이루어진 변화들 가운데, 시민들의 크고 작은 참여 없이 얻어진 것은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싶다. 

때로는 용기 있고 총명한 한 사람이 우리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으로 충분할 수도 있다. 그러나 흔히 볼 수 있는 경우는 다양한 의지를 가진 그룹들이 하나의 점으로 모여두는 현상이다. 이들이 진보를 일궈낸다. 어떤 그룹들은 다른 그룹들보다 더 잘 조직되어 있다. 지금 여러분에게 가장 신뢰를 주는 집단을 찾아라. 그리고 그들에게 당신의 에너지와 역동성을 보태라. 그렇게 해서 한탄스러운 현재의 상태를 뒤흔들어놓는 데 힘을 더하라. 

193쪽

결국 분노, 그리고 분노하라는 권고는 상스러운, 즉 '고결하지 못한' 공동체에 속했다는 불만스러운 실망의 감정에 기초하는 것이다. 분노한다는 것은 '긍지를 되찾겠다'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존엄성이라는 개념이 '분노'의 뿌리인 셈이다. 분노하는 자는 자신의 존엄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식한는 자이기 때문이다. 분노라는 행위는 기억을 재정립시킨다. 

그러나 분노는 훨씬 더 멀리까지 나아간다. 원한, 화 같은 비교적 고결하지 못한 일차적 동기에서 투쟁, 정치참여 같은 고결한 행위로 나아간다. 이렇듯 분노가 정치적 연금술이나 대변혁과도 비슷하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221쪽

그런데 왜 법인가? 법은 우리의 욕망에 유일한 한계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욕망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다니엘 컨벤디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갈등을 일으키는 민족주의적 꿈이니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 하는 것은 꿈을 제한하는 각자의 능력에 달려 있다고 설명한다. 그의 말대로 "시온주의자들의 꿈은 그들이 자신들의 꿈을 제한하는 테두리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게다가 컨벤디의 생각은 시온주의가 시작되던 초기의 정신(정교분리와 사회주의)으로의 회귀를 전제로 한다. 오늘날 이 초기의 정신은 종교에 의해 완전히 질식당해버렸다. 민족주의적인 꿈에 관련된 정치적 비전과 신학적 비전 사이에서 내부 갈등을 겪고 있고,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팔레스타인인들도 마찬가지다. 

민족들, 특히 국가들이 공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꿈에 자발적인 제한을 가해야 한다. 각각의 국가들이 존재할 권리를 갖고 있음을 명확히 하지 않는 국제법이라면 대체 그런 국제법이 무슨 소용인가.


233쪽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한 인터뷰에서 민주주의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문제는 사람들이 평등해지기보다 특혜를 누리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하찮은 평등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관심이 없다. 모든 사람에게 특혜를 줄 수 있는 기술을 발명한다면 완벽한 민주주의가 이루어질 것이다." 슬로터다이크의 정의는 재미있고 겉으로 보기에 역설적이다. 결국 특권이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는 데 문제의 핵심이 있다. 


257쪽

그렇게 해서 서구에는 최근에야 생태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는 경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동양 사람이나 불교동게는 생태주의가 삶에서 떼어낼 수 없는 영속적인 태도였던 반면, 서양인들에게는 우리를 둘러산 자연환경 혹은 환경 전체와의 상호의존이 필요하다는 역사적 자각을 통해 생태주의가 생겨났다. 나는 이러한 자각이 끝없이 확대되기를 바란다. 이런 의식은 더욱 명확해질 수 있으며, 일종의 깨달음에 다다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더이상 뭔가를 파괴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며 모두와 함께할 것이다. 


273쪽

즉 공공행정과 법뿐 아니라,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체라는 의미에서 사회 건설에 대한 애착을 기르는 교육이 필요하다. 

과거에는 가족이 이러한 역할을 어느 정도 담당했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더이상 과거와 같은 관계를 허락하지 않으며, 아이들은 대부분 부모의 영향력을 벗어난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아있을까. 지식을 전파하도록 교육받은 교사들? 그들의 방식이 계속되고 있긴 하지만, 삶의 의미를 전달하는 데는 큰 역할을 담당하지 못한다. 그 결과 길을 잃고 산만해져버린 젊은이들은 사회 속에서 자신의 역할이나 자신의 자리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한다. 매스미디어가 전파하는 개인의 성공스토리의 반대모델에 잡아먹히도록 스스로를 방치하기도 한다. 


277쪽

죽는다는 것은 존재하기 위한 또다른 방식이다. 살아 있는 것 또한 존재하는 또다른 방식이다. 존재를 표현하는 커다란 모자이크는 지구에 있는 것으로만 한정지어 말하자면 수많은 인간, 동물, 집 들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은 전체의 어딘가에 조화롭게 존재한다. 그리고 나는 곧 이 조화로운 세계 어딘로 다시 들어갈 것이다. 우리는 죽을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지닌 존재는 모든 실존하는 것들의 일부에 속하는 존재이며, 실존하는 것들의 거대한 공간에서 자신의 자리를 되찾는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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