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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이영미 역]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2011)

독서일기/에세이(외국)

by 태즈매니언 2015. 3. 4.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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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었던 하루키 소설도 많지 않고, 하루키가 결혼을 했다는 사실도 이번에 처음 알았는데 지난번에 읽었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꾸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가 괜찮은 느낌이어서 표지 색깔이 비슷한 이 책을 빌려왔다. 1979년부터 2010년까지 하루끼가 여기저기 발표하였거나 미발표한 에세이와 엽편소설 등 69편의 글을 실은 책이다. 서문의 표현대로 설날 복주머니 후케부쿠로같은 책.

하루키의 문장이 잘 읽힌다는 느낌은 확실했는데 문장단련이 음악감상을 통한 감각과 취미삼아 하는 번역작업을 통해서 다듬어졌다는 사실을 배웠다. 삼십년 가까이 해온 곡괭이질을 통해 단련한 등균육이 규칙적으로 꿈틀거리고, 타이핑한 문자들이 칼날처럼 힘차게 돌을 내리찍어 부수고 금맥을 찾는 마라토너다운 덕성도 다시 확인했고.

하루끼의 소설 중에서 <세상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태엽감는 새>를 꼭 읽어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 가능하면 <해변의 카프카>와 논픽션 <언더그라운드>도.

번역가로서의 하루끼가 추천한 작가들도 기회가 되면 접해보고 싶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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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쪽

오히려 거짓이 크면 클수록 교묘하면 교묘할수록 소설가는 사람들에게 찬사를 듣고 호평을 받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소설가는 뛰어난 거짓말을 함으로써, 현실에 가까운 허구를 만들어냄으로써, 진실을 어딘가 다른 곳으로 끌어내고 그곳에 새로운 빛을 비출 수 있기 대문입니다. 진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정확하게 묘사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진실을 꾀어내 허구가 있는 곳으로 옮겨놓고, 허구의 형태로 치환하여 진실의 끝자락이라도 붙잡으려 애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자기 안에 진실의 소재를 명확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그것이 뛰어난 거짓말을 하기 위한 주요한 자격입니다.

235쪽

오해를 감수하고 말하자면, 모든 성립과정의 종교는 기본적으로 이야기이자 픽션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국면에서 이야기는 -이를테면 백마술로서- 달리 예를 찾을 수 없는 강력한 치유력을 발휘한다. 그것은 우리가 뛰어난 소설을 읽을 때 자주 체험하는 일이기도 하다. 한 권의 소설이, 한 줄의 말이,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고 영혼을 구제한다. 다만 두말할 필요 없이 픽션은 늘 현실과 엄격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어떤 경우에 픽션은 우리의 실재를 깊게 삼켜버린다. 예를 들어 콘래드의 소설이 우리를 실제로 아프리카의 깊은 정글 속으로 끌고가듯이. 그러나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책장을 덮고, 현실로 돌아와야만 한다. 우리 모두는 픽션이 아닌 다른 곳에서 현실세계와 마주선 우리 자신을, 아마도 픽션과 힘을 상호교환하는 형태로, 완성해 나가야만 한다.

246쪽

폐쇄적 집단 안에서 '의식의 언어화'는 '의식의 기호화'로 결부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물론 의식의 언어화에 더없이 열심이다. 그러나 그들이 거기서 언어로 생각하는 것은 사실 언어라는 형태를 취한 기호에 불과할 때가 많다. 좁고 긴밀한 커뮤니티 안에서는 정보의 기호화가 쉽고, 그 방식이 훨씬 더 효과적으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기호화된 정보를 동료와 동시에 공유함으로써 연대감도 더욱 강해진다. 토론의 장 같은 곳에서 이런 유형의 기효화한 언어는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그러한 기호화는 장기적으로 보면 확실하게 개인의 내러티브=히스토리의 잠재력을 떨어뜨리고 그 자립성을 손상시킨다.

263쪽

나는 기본적으로 고전이 될만큼 뛰어난 명작은 몇 가지 다른 번역이 있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번역은 창작이 아니라 기술적인 대응의 한 형태에 불과하므로 다양한 다른 형태의 접근이 병렬적으로 존재하는 게 당연하다. 사람들은 흔히 '명번역'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그것은 달리 말하면 '매우 뛰어난 하나의 대응'이라는 의미이다. 유일무이한 완벽한 번역이란 원칙적으로 있을 수도 없으며, 그런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장기적인 안목으로 봤을 때는 작품에 오히려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고전이라 불릴만한 작품에는 몇 가지 대안이 필요하다. 양질의 몇 가지 선택지가 존재해 다양한 측면에서 집적하여 오리지널 텍스트의 본디 모습이 자연스레 떠오르게 하는 것이 번역의 가장 바람직한 자세가 아닐까?

285쪽

호러 미스터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독자를 얼마나 무섭게 만드느냐 하는 점이 아니다. 그저 단순하게 무섭게 만드는 글 정도는 솜씨가 조금 있는 작가라면 누구나 쓸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얼마만큼 독자를 uneasy하게 만드느냐 하는 것이다. uneasy하면서도 uncomfortable하지 않는 것이 양질의 호러 미스터리가 갖춰야할 조건이다. 이는 상당히 어려운 조건이다.

그러한 조건을 충족하려면 작가는 '나에게 공포는 무엇인가?'라는 개념을 확실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일급 호러 미스터리 작가가될 수 있다.

340쪽

지금까지 계속 번역을 해오면서 소설가로서 좋다고 느꼈던 점이 몇 가지 있다. 맨 먼저 현실적인 문제인데, 소설이 쓰고 싶지 않을 때는 번역을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점이다. 에세이 소재는 언젠가 바닥을 드러내지만 번역거리는 바닥날 일이 없다. 그리고 소설 쓰는 일과 번역 하는 일은 쓰는 머리의 부위가 달라서 번갈아하다보면 뇌의 균형이 좋아진다는 장점도 있다. 또 하나는 번역 작업을 통해 문장에 관해 많은 것을 배운다는 점이다. 외국어로 쓰인 어떤 작품을 읽고 '굉장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그 작품을 번역해본다. 그러면 그 글의 어디가 그렇게 훌륭했는가 하는 구조 같은 게 보다 명확하게 보이게 된다. 실제로 손을 사용해서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바꿔나가는 작업을 하다보면, 그 글을 단지 눈으로 읽을 때보다 보이는 것이 훨씬 많아지고 또한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런 작업을 오랜 시간에 걸쳐 계속하다보면 '좋은 글은 왜 좋은가'라는 원리 같은 것을 자연스레 알아차리게 된다.

406쪽

텔로니어스 멍크는 내가 가장 경애하는 재즈 피아니스트인데, "당신의 연주는 어떻게 그렇게 특별하게 울리나요?"라는 질문에 그는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가리키며 이렇게 대답했다.

"새로운 음은 어디에도 없어. 건반을 봐, 모든 음은 이미 그 안에 늘어서 있지. 그렇지만 어떤 음에다 자네가 확실한 의미를 담으면, 그것이 다르게 울려퍼지지. 자네야 해야할 일은 진정으로 의미를 담은 음들을 주워담는 거야.(It can't be any new note. When you look at the keyboard, all the notes are there already. But if you mean a note enough, it will sound different. You got to pick the notes you really m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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