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부터 시작되었다는 문학나눔 도서보급사업에 대해 전혀 몰랐었는데, 덕분에 故정아은 작가님의 책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작가가 될 생각이 없어서 볼 생각을 안했었는데, 생전에 단독 저서로 출간하신 마지막 단행본이 어떤 내용인지 궁금해 책을 들었다가, 책날개의 작가소개의 마지막 문장인 '작가로서의 삶을 이어오고 있다.'는 문장을 보고 읽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작법서+에세이'인 이 책에서 습작기간 6년에, 작가로 보낸 시간 11년인 저자는, 본인이 터득한 글쓰기의 기술과 작가라는 직업의 생활세계에 대해 두루두루 알려주십니다.
책 끄트머리에서 작가라는 직업의 정체성을 갖게 만드는 비밀을 말해주시는데, 자기 직업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수입은 적고 스트레스는 많은) 직업들에 공통적으로 적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매년 7만 종이 넘는 단행본들이 출간되는 출판대국이라 수만 명이 저자가 되지만, (30~40대인, 자녀를 둔 맞벌이 가정의 일원인) 전업작가라는 직업인이 되어서 사는 세계를, 남들이 신비롭게 보는 광채를 다 걷어내고 입버릇처럼 열심히 발버둥치는 '미물'의 분투 기록을 담담하게 남겨셨네요.
덕분에 작가를 꿈꾸는 많은 분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저도 여러 소설가들의 글쓰기 책을 읽어봤지만, 이 책처럼 동시대의 현장감각과 작가의 일상을 잘 포착한 책은 못봤던 것 같아요.
책에서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인 편집자에 대한 비중도 상당한데, 故정아은 작가의 논픽션이 제 에세이를 낸 출판사에서 제 책 다음으로 편집해서 내놓은 책이라 제가 직접 아는 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부분에선, 특별히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두툼한 전두환 평전을 읽는다는 게 마음의 부담이라 <전두환의 마지막 33년> 표지와 책등을 매번 보고만 넘어갔는데 힘을 내봐야겠고요. '전두환'을 소재로 한 '논픽션'이라는 이중으로 중압감과 품이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한 권의 책을 내기 위해 작가와 편집자가 얼마나 힘든 사투를 벌였는지를, 이젠 저도 알게 되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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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우리는 생각한 뒤에 쓰지만, 또한 쓰기 때문에 생각한다. 초고를 완성하는 것은 미처 하지 못했던 생각이 떠오를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다. 초고로 인해 일었던 생각들은 초고를 완성한 뒤 다시 고쳐 쓰는 퇴고의 과정에서 글에 반영된다.
(중략)
초고는 가건물이다. 세워놓은 뒤 이리 살피고 저리 살피다가, 결국 무너뜨리고 새로 짓기 위해 건설하는, 일종의 제물 혹은 희생양 같은 글더미다.
56쪽
합평을 당하는 자는 다양한 평가의 언어 세례 앞에서 초점을 자신과 평가자 사이에서 유연하게 옮길 줄 알아야 한다.
(중략)
타인이 쓴 글(=책)을 많이 읽고, 타인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며 든는(=경청) 경험을 많이 한 사람이 합평이라는 '지뢰가 잔뜩 깔린 대화의 장'을 제 글쓰기에 유용하게 쓰일 밑거름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
85, 88쪽
칼럼은 '빼기'의 기예가 중요한 글쓰기이고, '빼기'의 기예는 모든 종류의 글쓰기에 세련미를 입혀주는 일급 병기이다.
(중략)
이따금 하는 짧은 글쓰기는 생각을 다듬고 문장을 경제적으로 추리는 유용한 훈련이 될 수 있다.
102, 104쪽
결국 에세이는 '거리 두기'의 예술이라는 것. 내게 일어난 일을 기술하되, 그 일을 어느 정도까지 들낼지, 어떤 톤으로 드러낼지를 저울질하는 기예라는 것.
(중략)
즉 주제에 봉사하는 선 안에서만 개인사를 드러내는 것이 핵심이었다.
(중략)
에세이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힘이 강한 장르다.
128, 132쪽
근거에 목을 매는 이런 종류의 글쓰기에는 특유의 보상이 있었다. '뿌린 만큼 거둔다'는 느낌이다.
(중략)
내게 논픽션이라는 장르는 마치 문과 내의 이과 과목처럼 여겨졌다.
(중략)
논픽션은 이곳저곳 뚫린 공백이 많은 블루오션 같은 분야다.
136쪽
비소설이 우리에게 '말'로써 방향성을 제시해준다면, 소설은 '삶'으로써 방향성을 제시해준다.
(중략)
잘 쓰인 소설을 읽으면, 다른 사람이 되어보는 경험에 매우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
215쪽
새롭게 뭔가가 쓰고 싶어지면 조용히 자신에게 묻는다. 너, 그 이야기가 진짜 쓰고 싶어? 왜? 그러곤 상상한다. 몇 개월 뒤에 써낸 원고가 출판사에서 퇴짜 맞는 장면을. 시간을 들여 구체적으로 상상한다. 그리고 묻는다. 최악의 경우 출판이 안 될 수도 있어. 그래도 쓰고 싶니?
263쪽
세상은 넓고 편집자는 많지만, 내 글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나와 비슷한 독서 편력을 가진 편집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런 편집자를 만났다면 당연히, 쫓아가는 게 맞다.
273, 275쪽
작가와 편집자는 독특하고 깊고 처절한 관계에 돌입하게 된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곧바로 상대의 영혼 핵심부에 돌입해 들어가 그 세계와 씨름해야 하기에, 필수적으로 가까워지게 된다. 이 과정은 두 사람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가까워지는 과정에 호감이 개입하든 개입하지 않든, 강제적으로 이루어진다.
(중략)
업계의 다양한 종사자들을 만났다. 그중 가장 힘이 쎈 사람은, 갈등하고 부딪치더라도 결국 내 편에서 고개 숙이고 상대의 뜻을 수용하게 되는 이들은, 제 일에 아낌없이 제 일부를 투하하는 사람들이었다. S는 내가 만난 편집자들 중에서 가장 거침없이 일에 자신을 던져 넣는 사람이었다. 그로 인해 알게 되었다. 세상에는 원작자보다 더 원고를 사랑하는 편집자가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런 편집자는 원고에 일종의 영성을 불어넣으며, 그렇게 책에 입혀진 영성은 그대로 독자에게 날아가 박힌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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