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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화] 아파트 담장 넘어 도망친 도시생활자(2022)

독서일기/도시토목건축

by 태즈매니언 2025. 2. 8.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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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몰아서 읽으니 올해의 책을 이렇게 금방 또 만납니다.
 
앞서 몇 권의 한옥책들을 봤지만 아쉬웠고, 지난 몇 년 간 서울 사대문 안의 건축면적 20평이 채 안되는 작은 한옥집을 고친 건축주들의 책을 여럿 읽었는데, 24평 대지의 13평 한옥을 헐고 다시 지은 이 집 이야기가 비할 바가 없이 스펙타클하네요. 경험많은 건축사가 설계비는 다 받아놓고 자기가 장담한 시공비로 시공할 의향이 있는 시공사는 하나도 못구하는 일도 있을 줄이야.
혹시 차도 못들어가는 골목길 구옥이나 도심 한옥을 고쳐서 짓고 싶은 분들께 꼭 읽으시고 다른 예비건축주들에게도 권하셔요. 아니, 아파트단지를 비롯한 공동주택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들이라면 꼭 봐야할 한옥 르포르타주입니다.
 
의미없는 결혼식에 돈 쓰지 말고 갖고 있는 돈과 대출, 결혼식 비용으로 옆집이 술집이 되거나 5층 건물로 바뀔 걱정없이 마당이 있는 작은 집에서 오래 살고 싶다는 소망을 가진, 셋집에서 살던 30대 남녀커플이 토지와 한옥 매수과정에서의 터무니 없는 실수와 건축사와의 잘못된 만남, 하필 코로나19와 러우전쟁시기 건축비 급등의 위기 등을 어떻게 헤쳐나오는지 보셔야 합니다.

 

두 사람이 건축규제의 개미지옥들을 끈기있게 법령과 판례, 처분 선례를 찾고 만들어서 공무원들을 설득해서 건축 좌초위기를 넘기는 과정도 인상적이었고요.
 
또, 서촌 도시재생사업을 보면서 대한민국의 공공이 의무관리대상 공동주택에 살지 않는 국민들의 주거 인프라에 얼마나 돈을 쓰지 않는지, 정치인들이 도시재생 운운하면서도 당장 겉으로 티가 나는 벽화그리기나 공용건물 짓는 걸로 생색내고 정작 거주자에게 필요한 상하수도관 정비나 도시가스관 연결에는 예산을 안쓰는 현실을 하나씩 발견해나가는 과정이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 싶었습니다. 도시 인프라는 당연히 공짜가 아니지만, 꼭 사적으로 공동구매해야만 하는지...
건축전공자에 중앙일보 기자인 저자와 분과 공무원 아니면 공공기관 에이스 직원일 것 같은 파트너분처럼 잘 교육받고 똑똑한 두 분이 아닌, 평범한 건축주들이었다면 과연 이 대지에 한옥을 신축할 수 있었을까 싶습니다.

 

지금 '하하호호' 한옥에서 사시는 두 분이 가성비 좋은 건축을 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두 분이 서울시내에서 찾은 단독주택들은 둘 중 한 곳에 있었으니 방법이 없었습니다. 다들 빨리 노후화되서 아파트로 재개발되길 기다리는 사람들이 투자한 빌라들이 모인 동네거나, 지방출신 남녀 둘이 모은 돈으로 엄두도 못낼 부촌 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이 분들이 한옥보전지구 내 구축한옥을 매입할 수밖에 없었던 선택은 합리적입니다. 한옥보전지구만 아니었더라면 차라리 일본식 중목구조 주택을 선택했겠죠. 이러니 서울시에 있는 한옥이 1만 채도 안되는 걸테고요.
 
두 연인은 라이프 프로젝트로 본인들이 살고 싶은 하나뿐인 맞춤형 공간을 만들어내셨기 때문에 저같은 사람의 평가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비교는 2베이네 4베이네, 30평대네 40평대네 서열놀이하는 아파트 거주자들에게나 어울리죠.
이 책을 아마 건축공간연구원 국가한옥센터분들도 읽으실텐데 과연 빠른 시일 내에 한옥에 대한 비합리적인 규제들을 걷어낼 수 있을까요? 공공에서 일하고 법률/법제 업무로 먹고사는 저는 비관적입니다. 이런 분들의 고생과 하소연이 탑처럼 쌓여야 조금씩 바뀔 것 같습니다. 늙은이들이 심의위원회 자리를 차고 앉아서 '한옥의 전통과 아름다움' 운운하면서 합리적인 개선을 가로막는 상황이 쉽게 안달라질테니까요. 역시 대한민국 공공에서 규제를 많이 해서 제대로 굴러가는 분야는 없다는 생각을 더 굳히게 되네요.
 
제가 아래에 여러 구절을 인용해뒀는데 메모용으로 한거니 이 책을 읽으실 분들은 여기가 절취선입니다.
(아니면 서문인 9페이지 인용문만 읽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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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서울에서 집 짓기, 더 나아가 한옥 짓기는 녹록하지 않다. "한옥을 짓지 말라"라고 온 우주가 말리는듯한 경험을 했다. 한옥은 21세기 규제에 갇혀 조선시대로 회귀해야 하는 집이었다. 인허가를 거치면서 양옥에서 가능한 것들이 한옥에서는 죄다 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바뀌었다. 한옥은 집주인의 개성을 드러내거나 현대의 자재와 공법을 반영하기 어려운 집이었다. 가가호호 집주인은 분명 다른데 한옥이 다 엇비슷하게 생긴 이유다. 전통을 위해 민속촌을 만드는 것이 한옥 정책의 현주소다.
무엇보다 집 짓기에 나서면서 아파트 벽에 쓰인 'Made in 자이'가 얼마나 잘 다듬어진 세상인지 절절히 알게 됐다. 우리는 하지 않아도 됐을 싸움판을 만들어 스스로 뛰어들었다. 아파트만 좋은 집이냐? 우리는 더 나은 삶터를 개척할 수 있어! 자신만만하게 싸움판에 뛰어들었지만 우리의 레벨을 바로 깨달았다. 우리는 날달걀이었다.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판판이 깨졌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건 이 싸움판에서는 너나없이 날달걀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아파트가 대한민국의 평균적인 삶터로 자리매김하는 동안 아파트 밖 동네는 방치됐다. 어렵게 어렵게 내 집을 새로 지을 수 있어도 낙후한 동네 인프라를 바꾸긴 힘들었다. 단지 안의 안락한 생활은 집단으로 뭉친 개인들이 투자한 결과였다.
20쪽
판도라의 상자는 열렸다. 우리는 공원의 맛을 알아버렸다. 집밥처럼 질리지 않고 건강했다. 도시의 삶이란 모름지기 자기 아파트 앞 동만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연트럴파크는 바깥 공간의 소중함을 알려줬고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했다. 주거 욕망의 트리거가 됐다. 외기를 쐴 수 있는 바깥 공간이 있는 집에 살면 얼마나 좋을까. 방 개수를 줄이더라도 넓은 발코니나 마당이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짐을 바리바리 싸서 다닐 것도 없이 날이 좋든 안 좋든 집에서 쭉 놀 수 있으니 얼마나 편할까. 집 밖은 아무튼 피곤하다고!
34쪽
어느 날 밤 우리는 결론을 내렸다.
"서울에서 시골을 찾자. 도시지만 아닌 듯한 동네. 치안과 교통이 좋고 산이 가까운 곳에 살자."
97쪽
최근 서촌 대로변에 '경복궁 서측 도시재생지원센터'라는 공공 한옥이 하나 더 생겼다. 주민 공동 이용 시설임을 앞세우지만, 사실상 재생사업팀의 사무실이다. 서울시는 이 한옥의 매입 및 대수선을 위해 36억 원을 썼다. 몇몇 활동가를 위한 36억 원짜리 사무실을 지은 셈이다.
서촌에는 이미 여섯 채의 공공 한옥을 비롯해 공공이 소유한 건축자산이 많다. 하지만 평일 낮 시간대에만 운영되거나 주민들이 이용할 수 없는 곳이 대다수다. 경복궁 서측 도시재생지원센터의 경우도 주민들이 센터 내 회의실을 예약하려면 반드시 방문해야 한다. 이런 곳이 과연 주민들이 마음 편히 쓸 수 있는 열린 공간이 될 수 있을까? 주민의 필요와 관계없는, 누군가의 한 줄 치적이나 테이프 커팅식을 위한 공공건물만 자꾸 늘어나고 있다. 이를 운영하고 유지하려면 건립비의 몇 배가 되는 운영비가 필요하지만, 이 문제가 거론될 즈음에는 책임질 이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을 터라 그 누구도 이 문제를 신경 쓰지 않는다.
102쪽
오래 살아야 이웃사촌이 된다. 길도 정비되지 않고, 주차 문제로 매일 시비가 붙는, 그리하여 오래 살기 힘든 오래된 동네에는 공동체가 만들어질 수 없다. '선 정비, 후 공동체'가 맞다. 낡아 비틀거리는 동네에 공동체 시설부터 만들자고 주장하는 것은 지극히 낭만적인 시각이다. 혹은 공공이 해야 할 일을 공동체로 얼버무려 민간에게 또다시 미루려는 꼼수는 아닌지 의심스럽다. 공동체를 회복시키겠다며 벽화를 그리거나 보도블록 정도만 갈아 끼우는 것은 생색내기용 전시 행정일 뿐이다.
134쪽
(저자가 일본의 디자이너 하라 켄야를 인터뷰하면서 '좋은 집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은 질문에 대한 하라 켄야의 답변) "역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집이 제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안정감을 주는 집이죠. 비싸야 좋은 집이 아니라 내 의지로 선택한 집이자 작은 부분까지 (직접) 결정한 집이 좋은 집이라고 생각해요.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집에 살 때 자부삼과 확신을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마음에 안 들거나 원하지 않는 집에 살면 불안정한 삶을 살 수밖에 없잖아요."
154쪽
(집을 지어본 저자의 지인) "집을 짓고 나서 '이건 이렇게 하지, 왜 안 했어?'라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거든. 그럴 때 나도 이미 검토했지만 이유가 있어서 포기한 부분이라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 내가 왜 그걸 선택하지 않았는지 이유를 아니까. 그런데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더 나은 선택지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되면 속상하더라고. '왜 그걸 안 했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라는 마음이 드니까 불만족스러워지고. 충분히 고민해서 결정하는 게 좋아. 그래야 결국 포기하더라도 후회가 남지 않아."
182쪽
1930년대 들어 소위 집장수들이 지은 도심 한옥을 보면 유리, 벽돌, 타일, 함석 등 신식 재료를 많이 썼다. 서촌과 북촌에 이런 집이 꽤 많다. 집의 단열 성능이 떨어져서 외벽에 벽돌을 덧대는 경우도 많았다. 벽돌 벽을 쓰면 지붕의 무게를 버티느라 목재를 많이 쓰지 않아도 되니 비용도 아낄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나무는 비싸다.
만약 한옥이 오늘날에도 계속 지어졌다면, 벽돌 한옥은 더 많아졌을 것이다. 정부는 한옥을 육성하겠다며 벽돌을 막무가내로 쓰지 못하게 할 게 아니라, 벽돌 한옥의 가능성을 더 연구해야 하지 않을까.
185쪽
한옥 건축비의 30% 이상이 골조 비용, 즉 나뭇값이다. 한옥 지붕이 바뀌어야 고가의 건축비를 그나마 낮츨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189쪽
나와 진택은 한옥을 지으며, 그리고 한옥에서 사는 사람들을 만나며 확신하게 됐다. 한옥은 결코 대중화될 수 없는 집이다. 조선시대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집을 어떻게 대중화할 수 있겠는가.
198쪽
한옥 카페 어니언은 한옥을 원형대로 보존한 곳은 아니지만, 오히려 옛 공간의 원리를 더 잘 이해하게 하는 공간이다.
결국 사는 사람이 주인공이 돼야 한다. 한옥이 주인공이어서는 명맥을 이어가기 힘들다. 한옥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 옛것의 가치와 현대 생활의 변화를 두루 살피고 공간에 담아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223쪽
('매일 미인이랑 사는 기분'이라며 한옥을 예찬한 저자의 한옥 멘토)
"집 짓기를 할 때 각자의 역할이 있어요. 시공자는 연장을, 설계자는 도면을, 건축주는 계산기를 꺼내는 거예요. 일단 (계산기를) 두드리세요. 그게 모두를 위한 일입니다. 공사가 중단되는 상황을 맞고 싶지 않다면 건축주는 열심히 두드려야 합니다. 건축비는 예산의 85~90퍼센트가 적당해요. 나머지는 예비비로 갖고 있어야 해요. 짓다 보면 늘 공사비를 초과하거든요."
227쪽
은평 한옥마을에 고진티엔시(이하 고진)가 지은 다른 한옥을 취재한 적이 있었다. 고진은 목경헌을 비롯해 한옥 수십 채를 지었다. 게다가 강석목 대표는 은평 한옥마을에서 자신이 직접 지은 한옥에 산다.
대단한 일이다. 한옥에 살아서가 아니라, 본인이 지은 한옥이 수두룩한 한옥마을에 살고 있다는 것이. 매일 일어나 대문 밖을 나서면 수십 명의 건축주, 즉 민원인을 만나야 하는 삶이다. 집을 짓고 나서 건축주와 시공사 사이가 틀어지는 일도 많다. 그런데 한 동네에서 살아간다고? 수십 명이나 되는 건축주와 함께? 건축주는 늘 불만이 많지만, 한옥 건축주는 특히나 불만이 많은 민원인에 속한다.
249쪽
지하 공사를 하기 전에 걱정했던 것은 무려 네 가지였다. 문화재, 돌, 물, 옆집.
295쪽
차만 없어도 동네가 이렇게 조용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한번은 안방에 앉아 휴대전화 앱으로 소음을 측정해 보았다. 22데시벨이 나왔다. 이는 적막이 흐르는 방에서 들을 수 있는 나뭇잎이 부딪히는 소리나 모기 소리 정도라고 한다.
339쪽
집을 한창 짓고 있을 때 현장에 종종 들르던 시공사 전무님은 늘 우리를 걱정했다. 우리 집에 경제성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다 짓고 나면 숙박공유사업을 해보라고 추천했다. "좋은 집에서 제가 살아야죠. 왜 그런걸 해요."라고 응수하면 돌아오는 답은 늘 똑같았다.
"그래야 돈을 벌 거 아니에요. 여기에 살기만 하면 경제성이..."
(중략)
집이 얼마짜리냐고 묻지 말고, 이 집에서의 삶은 얼마짜리냐고 물어보자. 더 단순히 1박의 가격을 따져보면 된다. 우리는 집을 얼마에 팔 수 있는지 여전히 모르지만, 우리 집이 1박에 얼마짜리인지 종종 계산하며 흐뭇해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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