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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숙] 창신동 여자(2023)

독서일기/국내소설

by 태즈매니언 2025. 6. 12.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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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리 손 원장님의 강력 추천덕분에 저자나 내용에 대해 전혀 모르고 그저 얇아서 빌려온 책이었습니다.

직장일과 생활의 스트레스가 먼지처럼 쌓여서 감정의 표면이 다 덮여버린 느낌이 드는 날이면, 넷플릭스 영상을 하나 볼 마음의 기력도 안생기더라구요. 그런 날은 오늘치의 무료보기 웹툰과 웹소설, 유튭 구독채널 영상들을 보다가 두어 시간을 소진하고서 잠자리에 들곤 했죠.

오늘도 그런 날이라 이런 날 볼 수 있는 얇은 문고판으로 된 단편소설인 <창신동 여자>를 펴냈는데, 이렇게 올해의 소설 한 권을 만나다니.

소설의 주인공은 재가 요양보호사인데, 요양보호사와 독거노인 돌봄 노동을 하며 구술생애사를 채록해왔던 저자이기에 관찰하는 시선에 담긴 깊이가 깊습니다. 그리고 그 시선이 향하는 곳이 요양보호 대상자가 아닌, 그 사람 옆에 붙어있는 동거인이라는 점이 이채롭습니다.

깡패두목에 포주를 하면서 감옥을 여러 차례 드나들었던, 건강이 좋지 않은 기초생활수급자 노인에게 주어지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복지혜택들과 재가 요양보호서비스가 어떤 것들인지를 담담히 그냥 보여주면서 읽는 이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며 시작하더니, 수급자 노인과 그 동거인의 관계를 단편적으로 던져지는 생애사 조각들로 유추하도록 만듭니다.

관찰대상인 두 늙은 남녀의 관계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 <나쁜 남자>의 깡패두목 포주와 그한테 얽혀서 나락으로 간 여주인공이 30년을 쭉 그렇게 살아오면서 영락한, 가진 것은 물론 인간관계도 상대방 말고는 아무도 없는 상태를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게 담고 있네요. 내일에 대한 어떤 희망도 없이 서로를 욕하고 괴롭히며 한가닥 남은 자존감을 채우며 하루를 보내는 모습을요.

제가 좋아하는 권여선 작가님 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과 화자의 시선과 비슷하면서도 고도수의 버번 위스키처럼 훨씬 독하고 어질어질했습니다.

제가 어떤 삶을 살더라도 택하고 싶지 않은 합법적인 직업을 꼽는다면 반드시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일이 재가 요양보호사인데, 그 일을 할 때 발견할 수 있는 사람들의 적나라하고 본질적인 모습을 이렇게 간접적으로 견식할 수 있다니 역시 소설이 좋습니다.

100페이지가 살짝 넘는 문고판의 가격이 13,000원이라 과연 1쇄를 다 소화하셨을지 의문이지만, 역시 책의 가치는 분량과 무관합니다. 표지디자인과 문구도 잘한 책이라고 생각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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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쪽

남의 눈을 무서워하는 세상살이에서 흉허물을 스스로 까발리는 것은, 배수진의 지경이자 퇴로없는 사람의 마지막 공세다.

32쪽

요양센터는 노인과 요양보호사를 연결하는 플랫폼일 뿐이다. 임금은 매일 세 시간의 시급을 모아 달마다 지급한다. 노인과 요양보호사 사이에 문제만 없다면, 센터와 요양보호사 사이는 계산과 지급 이외에 관계랄 것이 없다.

39쪽

대부분의 재가 요양보호사들은 '먹는 문제'로 노인이나 노인 가족들에게서 모멸감을 느낀 경험이 있다. 모멸감을 주려는 의도와 상관없는 경우도 많다. 게다가 밥을 얻어먹는 것은 어떤 부당한 요구를 차마 거절하지 못하게 한다.

48쪽

여성 홈리스나 성매매 여성들 중에는 더 큰 위험을 피하느라 그 바닥 센 남자의 여자로 있는 경우가 많고, 폭력이나 경제적 갈취를 당하면서도 외로움을 피해 동거나 동반자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54쪽

더 겪으면서 보니, 둘은 생애 이력이나 심리적으로 서로 얽히고설킨 채 엉겨 붙은 덕에 피차 아직 무너지지 않고 있었고, 따로 떨어지면 금세 각각 무너져버릴 것 같았다.

72쪽

이 경지는 어떤 삶을 경과해야 도달하는가. 빈곤이 유일한 밑천인 사람의 힘인가. 후안무치인가. 바닥을 친 사람의 신경질과 권력 꼭대기에 오른 자의 신경질은 어떻게 비슷하고 어떻게 다른가. 다 빼앗긴 사람이 자괴와 모멸을 분노로 뒤집는 지렛대는 무엇인가.

78쪽

여자의 소비 습관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절약과 성실을 배울 기회도 없었고, 그 쓸모나 결과를 누릴 기회도 없었다. 그러니 '있으면 쓰고 없으면 말고'가 살아가는 방식이고, 남의 것도 할 수 있으면 제 것처럼 끌어다 쓰는 거다. 늘 빼앗기고 살아온 사람으로선 그렇게라도 살아야 하고, 그래야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하필 내가 거듭 당하기는 싫었다. 바보가 되는 느낌이고, 그 느낌을 들키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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