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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권남희 역]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2013)

독서일기/에세이(외국)

by 태즈매니언 2015. 6. 4.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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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가 젊은 여성들이 보는 잡지에 연재한 글을 모은 에세이집. 머리말에서 쓴 것처럼 '아저씨 동류성'을 의식하지 않고 '공통된 화제 따위는 없다'는 마음으로 자유롭게 쓴 글들이다보니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바람처럼 훅 불어서 쓴 글이랄까. 세계 각지로 훌쩍 떠나 몇 달 씩 살다가 오는 여행법(또는 거주법)도 참 부러운데 당장은 따라할 수가 없다.


세계적으로 잘팔리는 작가인데도 불구하고 하루키는 그런 자신의 지위에 대해 의식하지 않기에 자기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에 대한 에세이들을 잘 쓴다. 그의 에세이들을 읽으면 직업과 여가의 균형을 잘 유지하며 살아가는 생활인의 모습이 보이는데 그 부분이 멋지다. 유명해졌다고 해서 굳이 남들을 의식할 필요가 없는거야 다들 알겠지만 보통은 쉬운 일이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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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쪽 


소설가가 되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날마다 출퇴근을 하지 않아도 되고 회의가 없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가 없는 것만으로 인생의 시간은 대폭 절약된다. 


한 가지 더 소설가가 된 기쁨을 절실히 느낄 대는 솔직하게 "모릅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다. (중략) 만약 내가 TV방송 패널이나 대학교수였다면, 그렇게 간단히 "모릅니다."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을 물어도 일단은 그럴듯하게 대답하지 않으면 입장이 난처해진다. 그러나 소설가에게 무지는 특별히 부끄러운게 아니다. (중략) 이건 뭐랄까, 정말로 좋다. 내가 모르는 것을 까놓고 "모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만큼 편한 일도 없다. 그것만으로 수명이 오 년 반 정도 늘어날 것 같다. 


100쪽


이솝우화 중에 '개미와 배짱이' 이야기가 있다. 그건 원래 '개미와 매미'이야기였다. 그리스에는 매미가 서식하므로 이솝은 아주 자연스럽게 매미를 등장시켰다. 그런데 그러면 북유럽 사람들은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므로 매미를 베짱이로 바꿔버렸다. 일본인이라면 반대로 "아, 과연, 그게 매미였구나. 매미라니까 더 이해가 잘 되네"라고 할 것이다. 여름에는 떠들썩하게 울지만 가을바람이 불 무렵이면 한풀 꺾인다.베짱이가 운다는 말은 감각적으로 별로 와닿지 않는다.


184쪽


고타스 씨에 따르면 그리스에서 전령은 온전히 직접 달리는 걸로 정해져 있다고 했다. 말을 타고 달려가면 아무래도 눈에 띄어 "아, 저건 전령이다."하고 알리는 셈이 되어 적에게 화살을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냥 달리는 사람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말을 타고는 가지 못할 좁은 길이나 험한 길도 거침없이 갈 수 있다. 


그리스에는 험한 산이 많고 도로도 잘 정비되어 있지 않아서, 장거리를 빨리 달릴 수 있는 전령을 귀히 여겼다. 과연, 말보다 사람이 실용적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설명을 듣고 나니 이해가 됐다.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필리피데스라는 전령은 마라톤 전쟁 전에 지원군을 요청하는 서한을 들고 아테네에서 스파르타까지 이틀에 걸쳐 약 466킬로미터를 달렸다.


191쪽


여자관계에 관해 말하자면 '그때, 하려고 마음만 먹었으면 할 수 있었을 텐데'하는 사례는 몇 번이나 있지만 그건 특별히 후회할 정도의 일은 아니다. 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은 것은 일종의 가능성의 저축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저축의 온기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때로 우리의 춥디추운 인생을 서서히 훈훈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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