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슈테판 츠바이크/오지원 역] 우정, 나의 종교(2016)

독서일기/에세이(외국)

by 태즈매니언 2016. 6. 20. 04:55

본문


생각하지 못했던 기회에 선물받아 읽게 된 따끈따끈한 신간서적. 슈테판 츠바이크의 작품은 <광기와 우연의 역사> 한 권을 읽었다는 사실만 기억이 난다. 예전에 좀 좋아했던 아르투어 슈니츨러와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둘 다 10여년 터울로 오스트리아 빈에서 활동한 작가였다는 걸 알았을 때 좀 신기하더라. 


이 책은 전기(biography) 형태의 글에서 특히 탁월했던 슈테판 츠바이크가 살아면서 실제로 만나고 교류했던 인물 12명에 대한 추도사, 기고문 등을 모은 산문집이었다. 검정색 표지와 목차가 십자가 형태를 구성하고 있는 데 글에 담긴 추모의 뜻과 잘 맞아서 훌륭한 표지디자인이라 생각된다. 문고판 사이즈여서 이동 중에 읽기도 편했고.


츠바이크가 추모했던 동시대의 12명의 인물들 중 음악가들은 전혀 모르는 수준이었고, 직접 쓴 책을 읽어본 사람은 톨스토이, 로맹 롤랑, 프로이트, 슈바이처 정도였다. 시에 문외한이라 릴케와 바이런은 이해해보려고 애썼을 뿐 소득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추모의 대상인 사람들이 나보다 백년 전의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건 이 책의 내용을 공감하기에 좋은 조건은 아니다. 


하지만 개개의 인물에 대한 츠바이크의 애정어린 찬사들을 읽으며, 살면서 귀감이 되는 감탄스러운 인물의 업적을 알아보고, 그와 교분을 나눈다는 것이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며, 또 그를 잃었을 때 비탄에 잠기에 하는지 그 감정이 전해졌다. 


마르셀 프루스트 같은 경우는 그 두툼하고 지루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왜 그리 높은 평가를 받는지 여전히 모르지만 그에게 글을 쓴다는 것이 얼머나 힘든 작업이었는지에 관한 츠바이크의 기록이 너무나도 생생해서 인상깊었다. 톨스토이에 대해서는 짧은 분량으로 그가 전하고자 했던 주장을 톨스토이 본인보다 더 잘 옮긴 것 같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감탄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와 관련하여 스트라스부르의 대성당이 주는 압도적인 느낌에 대한 츠바이크의 묘사를 통해 3년 전 직접 그 대성당을 보고 주변을 거닐며 느꼈던 감동을 되살려볼 수 있었다.(슈바이처가 이렇게 다방면에서 탁월한 성취를 이룬 대단한 인물이었던 것도 처음 알았다.)  


독일 콘스탄츠 대학에서 공부하셨다는 오지원씨의 첫 번역 작품이라는데 번역이 아주 빼어나서 감탄했다. 옮기기가 까다로웠을 표현들을 잘 읽히고 진부하지 않는 아름다운 문장들을 잘 옮겨주셨더라. 내가 읽었던 책들에 대한 서평을 남길 때 번역 서적에 대해서 제목에 항상 번역자 성함도 병기하고 있다. 바로 이런 분들에 대한 내 나름으로 감사함을 표시하는 방법이다. 


----------------------


105쪽


톨스토이가 사회질서를 부정하고 비난하는 대신 미래의 더 나은 인간 공동체 건설 방법을 제안함으로써 진단에서 치료의 과정으로 나아가려던 순간, 그의 개념은 완전히 애매해지고 생각은 혼란스러워졌다. 


134쪽


30세의 신학 교수였던 그(알베르트 슈바이처)는 명인의 자리에 오른 오르간 연주자 중 한 명이자 음악학자로서 이름을 떨치고 있었지만, 경제적 상황이 어려워졌음에도 열여덟 살짜리 아이들과 함께 다시 파리의 대학 강의실에 앉아 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911년, 36세가 된 그는 의사 국가고시를 통과했다. 1년간의 실습을 거친 뒤 박사 논문을 취득해 거의 40세에 이르러서야 그는 마침내 이 땅의 다른 영역으로 가는 여행길에 오를 수 있었다. 


213쪽


예술의 품위와 정신을 지키는 데 있어 예술 활동이 쾌적하고 윤택해진 것만큼이나, 오늘날 라디오와 축음기를 통해 원할 때마다 고상한 음악을 편하게 들을 수 있게 된 것도 한편으로는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 편리함이라는 것이 대개 창작에 들어간 노력을 잊게 하고, 예술을 바라볼 때의 긴장감이나 경외심을 제거해 예술을 맹리 먹고 마시는 빵과 맥주처럼 받아들이게 하기 때문이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