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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호께이/강초아 역] 13.67(2015)

독서일기/추리소설

by 태즈매니언 2016. 8. 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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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완독한 대니얼 예긴의 책과 번갈아서 읽다보니 역시 오래 걸린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을 훌훌 넘겨가며 읽지 않고 한 권을 이루는 한편의 단편을 적어도 한번씩은 끊어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난 추리소설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나마 <화차>처럼 사회파 추리소설을 좀 더 선호하기는 했지만 아예 판타지로 빠지는 무협소설은 좋아라하면서도 지극히 정밀하게 사람의 행동과 심리를 분절하고 가설과 검증으로 엮은 플롯들이 그리 현실적이지 않다고 느껴져였던 것 같다. 두뇌게임을 즐길만큼 머리가 좋지 못한 점도 영향이 컸고.

 

그런데 대만에서 활동하는 홍콩출신 작가라는 '찬호께이'의 이 압도적인 작품은 하잖은 내가 앞서 언급한 장르의 규칙 따위로 폄하할 수 없는 탁월한 작품이었다. 추리소설이지만 추리적인 요소의 이 책의 가치 중 수면위로 드러난 빙산 부분에 불과하더라. 매번 말뿐이지만 이런 책을 추천해주신 페친께 감사하다.

 

한 편 한 편의 단편에서도 추리보다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지켜보기와 관계맺음, 그로 인한 인연의 결과가 여섯 편의 단편에서 변주되고 있었다. 대위법을 전혀 모르지만 여섯 단편들이 모여 파헬벨의 캐논처럼 소름이 돋는 걸작을 빚어냈다.

 

불가의 연기설이 종교 교리라면 찬호께이는 이 연기설을 과학적으로 정밀하게 분석하여 연기설의 교리에 못지 않은 삶의 목적과 사회의 의미대에 대한 철학을 보여주고 있었다. 13에서 67로의 역행적 구성을 통해 여섯개의 재질을 알 수 없는 원통형 토막에 숭숭뚤린 공기구멍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이게 하나의 길게 이어진 호박엿 가락의 끊어진 마디임을 보여주고 그 엿을 다시 원래대로 붙여놓고 홀홀 사라져버린 엿장수를 보는 느낌이었다.

 

장르소설이라는 구분은 가능하지만, 뛰어난 장르소설은 장르라는 구분을 헛되게 만드는 경지구나. 찬호께이의 다른 작품들도 찾아보겠지만 천재라고 하더라도 이런 작품을 더 썼다면 아무래도 반칙이란 생각이 드네.

 

내가 홍콩 곳곳의 지리를 잘 아는 현지인이었으면 훨씬 더 재미있게 읽었을텐데. 시간적인 역행은 쭈욱 읽어가며 역사와 개인들의 더께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만 여행자로 몇 번 다녀갔을 뿐인지라 켜켜이 쌓인 공간적인 지층을 이용한 찬호께이의 섬세한 장치들은 알아보지 못해 아쉽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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