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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이치 노리토시/이언숙 역] 절망의 나라에서 행복한 젊은이들(2011)

독서일기/일본

by 태즈매니언 2017. 7. 5.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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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리세대(달관세대)’라는 용어와 함께 2년 전에 화제가 되었던 책을 이제야 읽었습니다. 세대론은 별 의미없다고 생각해서 찾아볼 생각이 없었는데, 85년생인 후루이치 노리토시씨가 2011년에 출판했으니 본인도 20대 중반일 때 썼다기에 마음을 바꿨네요.

 

300페이지 남짓인 본문 중에서 270페이지는 별로 남지 않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일본에서의 세대론의 전개를 꼼꼼하게 정리한 점이나 저자 또래의 일본 20대들이 2010년경에 어떤 생활을 했고, 이들을 바라보는 소위 ‘어른’들의 지적질 사례를 참고하는 정도밖에는. 스스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써내려간다는 느낌에 그냥 덮을 생각도 할 정도로요.

 

그런데 마지막 장인 제6장 <절망의 나라에 사는 행복한 젊은이들>은 참 괜찮습니다. 이 부분만 발췌해서 보시길 권하고 싶네요. 읽으면서 아직도 일본의 한국의 미래인 부분이 많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2008년 현재 3명의 현역 세대가 1명의 고령자를 부양하고 있고, 2023년에는 2명의 현역 세대가 1명의 고령자를 부양하게 될 것으로 예측되고. 연금과 의료 등 공적 부분에 대한 수익과 부담을 회계적으로 따져봤을 때 2005년 기준으로 60세 이상 세대는 6,500만 엔 이득을, 20세 미만 세대는 5,200만 엔의 부담을 지게 되어서 손자세대가 조부모 세대보다 1억 엔가량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현재 젊은이들이 이용하고 있는 인프라와 테크놀로지들은 대부분 이전 세대가 구축해 놓았죠. 지금 일본의 이십 대가 ‘1억 엔의 손해’를 보는 게 억울하다고 단카이 세대가 되는 걸 선택할까요?

 

과로사라는 단어를 만들어 낼 정도로 억압적인 분위기에서 주 60시간 이상 근무하던 사축생활, 결혼한 여자에겐 가정주부가 아닌 선택이 제한된 상황, 더러운 공기와 물, 바나나도 큰맘 먹고 사먹어야 하고, 스마트폰은커녕 휴대전화와 인터넷도 없는 시절인데 말이죠. 결핍이라는 감정은 무언가를 경험하고 소유하기 전엔 느껴볼 수 없다지만 저라면 ‘앞으로’ 경제 성장이 보장되어 있다 해도, 이왕이면 ‘지금’ 풍요로운 편을 선택하겠습니다.

 

일본에서도 세대 간 격차에 분노하고 그것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호소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2011년 기준으로 40대 전후의 ‘삼촌들’이라는 사실도 우리나라의 486들과 겹쳐보여서 재미있었습니다. 그런 ‘삼촌들’이 ‘세대 간 격차’ 문제를 부추기면서 사회 문제를 세대 문제로 처리해버릴수록 의회제 민주주의 체제에서 젊은 층에게는 승산이 없는데 말이죠. IMF 직후에 입학한 98학번인 제가 486과 차별을 찬성하는 20대 사이에 끼어 있어서 인지 공감이 갔습니다.

 

OECD 못난이들 중에서 우리나라가 가장 독보적인 위업(?)을 자랑하는 지표가 노인빈곤률과 자살률로 알고 있었는데 일본도 만만치 않더군요. 2010년 기준으로 일본의 생활보호대상자 중 고령자 세대가 약 40%이고(그나마 노인빈곤률은 20%), 자살자 중 60대 이상이 38%라니.

 

또한 거시적으로 바라본 세대 간 격차는 미시적으로 보면 가족 내부에서 자산을 축척했고 부유한 단카이세대 부모가 동거 자녀들에게 가족 복지의 혜택을 제공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상쇄되는 측면도 지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과 흡사하더군요. 게다가 경력 사다리가 사라져가는 시대라 젊은이들이 장기적으로 소득을 늘릴 기회는 이미 좁아지고 있지요.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사회보장제도를 지나치게 ‘기업을 통한 복지’에 의존해온 대가긴 합니다.

 

인터랙티브 미디어와 SNS로 인해 인간이 가지는 승인욕구를 연인이나 친구가 아닌 다른 ‘도구’들을 통해 분산해서 채울 수 있다 보니 자율성과 다양성은 보장되지만 안정성이 떨어지는 ‘무연사회(無緣社會)’ 현상도 일본과 한국이 도시국가 다음으로 심하지 않나 싶고요.

 

저자의 통찰은 2004년 일본의 한 연구자가 텐진시에서 1200명의 농민공과 600명의 텐진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통해 빛을 발합니다. 호구가 없어 아무런 사회보장을 제공받지 못하는 열악한 환경에서 힘든 노동을 하는 농민공들의 생활만족도가 85%로 텐진주민들의 75%보다 훨씬 높았다고 하네요. 그리고 대도시 호구를 가진 고학력 워킹푸어 청년을 의미하는 ‘개미족’에 속하는 청년들의 생활 만족도는 1%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사회학에서 말하는 ‘준거집단’과 ‘상대적 박탈’의 좋은 사례이지요.

 

이를 통해서 저자는 만약 일본이 격차가 고정된 계급 사회, 또는 신분제 사회로 바뀐다면 ‘혹시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던집니다. 일본의 젊은이들이 농민공화되었다는 이야기죠. 최근 캐나다의 외무장관이 된 크리스티아 프릴랜드의 <플루토크라트>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극소수의 글로벌 인재와 나머지로 나뉘는 신중세 시대가 되더라도 요시노야 규동을 먹고 Wii나 PSP, 아이폰을 쥐어주기만 한다면 튀니지와 같은 폭동은 일어나지 않을거라고 봅니다. 저자는 앞으로 ‘사토리세대’만이 아닌 일본인 중 1억 명이 ‘젊은이’가 되는 미래가 찾아올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고요.

 

지정학적인 리스크가 현실화되지만 않는다면, 일본보다는 우리나라가 경제발전과 민주주의의 성취를 공고화하는 길에 들어섰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거시적인 판단과 달리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과 상당부분 유사한 관점에서 제 개인적 삶의 방식을 선택했기에 마지막 장에서 저자가 쏟아내는 말들에 많이 공감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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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9쪽

 

2030년에는 ‘잃어버린 세대’라고 불리는 또 다른 세대가 60세를 맞이한다. 그때가 되면 ‘은둔형 외톨이’나 ‘NEET’는 ‘젊은이 문제’인 동시에, ‘고령자 문제’로 다뤄지게 될 것이다. 소비 욕구가 왕성한 단카이세대가 줄어들고, 늙어버린 ‘잃어버린 세대’가 차츰 증가하는 사회를 과연 현역 세대가 부양할 수 있을까? 
(지금의 프리터 자녀들은 돈 쓸 일이 많지 않다지만 10년~20년 후에도 건강한다는 보장도 없고, 본격적으로 의료비가 많이 들어갈 단카이세대 부모를 부양하면서 물려받은 주택을 보수 관리할 책임도 넘겨받을 시점이기도 합니다.)

 

311쪽

 

‘그때’로는 되돌아갈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때’의 사람들이 동경하던 미래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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