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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나베 기요시/장성주 역] 산산조각 난 신(1977)

독서일기/일본

by 태즈매니언 2017. 5. 24.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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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다우어의 <패배를 껴안고>에서 여러 번 인용되었던 이 책이 출판된지 40년만에 한국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전 <패배를 껴안고>를 두어 달 전에야 읽어서 별로 기다리지 않고 읽었지만 이 책의 번역을 오래 기다렸던 분들이 많으셨을 것 같네요. 번역해주신 장성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책은 시즈오카 농촌마을의 차남으로 태어나 1941년 소학교를 졸업하고 학교 선생님 등 주변의 독려 속에 해군 수병으로 배치되서 여러 차례 생사를 넘나드는 처절한 전투를 겪고 나서 1945년 8월 귀환한 스무 살도 안 된 소년병 와타나베 기요시가 고향마을에서 보낸 7개월 동안의 일기입니다.

1945년 8월 무조건 항복 직후 일본 농촌 마을의 분위기, 군수물자 횡령과 도시의 식량난, 농촌마을의 빡빡하고 연중 이어지는 중노동, 귀축미영을 부르짖던 인사들의 표변, 제국 해군의 가혹한 구타와 장교들의 압제, 귀환병들의 방황, 반전주의 등 풍부한 내용이 많습니다.(<오이디푸스 왕>에 맞먹을 역인혼이 초래한 비극도 충격적이었고요.)


하지만 이 책의 가장 뛰어난 점은 역시 히로히토 천왕과 천황제도에 대해서 소학교만 나온 귀환병이 냉철하게 비판하는 부분이겠죠. 그 자신도 천황의 개전명령으로 피해를 본 사람이지만 기요시의 준엄한 질책은 외지 곳곳의 전투로 죽어간 일본청년들, 남편을 잃고 살기 위해 몸을 파는 아내, 부모를 잃고 시골마을을 유랑하는 고아,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 식량을 구하지 못해 굶어죽은 도시민, 군인들에게 살육당하고 강간당한 현지인들의 절규를 담고 있기에 더없이 묵직합니다. 이러니 일본에서도 1977년에서야 출간되었겠지요. 와타나베 기요시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이런 인물이야 말로 동아시아에 필요한 근대적 개인의 상징이지 않나 싶습니다. 
(마지막에 기요시가 히로히토 천왕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당신'이 일본어 인칭 표현인 'あなた(아나타)', '君(키미)', 'お前(오마에)' 중에 어떤 단어였을지 궁금하더군요.) - 나중에 번역자분께서 아나타라고 확인해주셨습니다. 


일본은 여러모로 대단한 나라지만 아직도 손오공의 금고아같은 천황제를 유지하고 있는 걸 보면 안타깝고요. 그런 일본이 한반도에서 군주제에 대한 복벽주의를 끝장낸 1등 공신이라는 점도 아이러니 하고요.(지금도 명성황후나 덕혜옹주 운운하는 이들이 있고, 공산주의를 표방했던 북한이 3대 세습하는걸 보면 군주제 밈의 절멸이 쉬운 건 아닌 듯 싶지만요)


을사조약을 통해서 주권(외교권)을 넘겨받으면서 대한제국의 황족들을 일본제국 황족에 준하는 대우로 예우했고, 일제하 이왕가는 천황에 이어 황족 중 두번째 부자였죠. 망국의 군주코스프레 안하고 행복한 개돼지로 살아줘서 고마운 일족들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http://m.pub.chosun.com/mobile/news/view.asp… 를 보시면 좋습니다.)


해방 후 한반도 거주자들은 와타나베 기요시처럼 괴로워할 필요도 없었고, 곧 발발한 한국전쟁은 복벽주의의 찌꺼기까지 다 쓸어가 버렸으니...


중간에 제 감상이 조선 왕가 이야기로 좀 샜는데, 자기 자신의 경험과 사고로 판단하려고 노력하는 근대적 개인의 전범을 관찰할 수 있는 좋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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