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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카플란/이순호 역] 타타르로 가는 길(2000)

독서일기/중앙아시아

by 태즈매니언 2020. 3. 22.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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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페이지 남짓이지 벽돌책이라고 하기 어려운데 내게는 여느 벽돌책보다 힘들었다. 처음 읽기 시작했던 게 반년 전이었는데 중간에 띄엄띄엄 읽다보니 흐름이 끊겨서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19세기 오스만 투르크의 임박한 사망으로 인한 '동방문제'를 두고 대영제국과 러시아제국이 중근동 지방에서 벌였던 그레이트 게임, 양차 세계대전, 스탈린 등 구소련의 흔적, 천연가스와 석유 시추로 인해 몰려드는 달러들때문에 역사의 흐름을 따라가는지 칵테일 레시피를 읽는지 헷갈릴 정도로 복잡한 이야기들이 줄줄 나온다. 거기에 유대인 카플란의 개인사까지 양념되니. ㅎㅎ 세상이 단순하지 않다는 진실을 깨닫는데 유용한 책이다.

 

유럽이나 미국사람이 김호동 교수님의 에세이 <황하에서 천산까지>를 읽으면서 동아시아 역사속의 사건들과 여러 민족의 흥망성쇠를 몰라 끙끙대는 모습을 떠올리시면 된다.

 

조지 W. 부시 2세 전 대통령의 멍청함에 대한 농담이 많지만 이 책을 직접 읽고 주변 참모들에게 권했다는 걸 보면 얼렁뚱땅 대통령이 된 사람은 아닌듯 싶다.

 

속표지 지도에 그려진 로버트 카플란의 여정은 1998~2000년 사이에 이뤄졌다. 지금부터 20년 이전의 이야기인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2020년 발칸과 중근동의 현 상황이 왜 이렇게 흘러왔는지 그 연원을 이해하는데 유용하더라.

 

여행기의 시작이 내가 타봤던 소피아-이스탄불 야간열차 탑승부터라 깜짝 놀랐다. 두 달 전에 불가리아의 소피아와 터키의 이스탄불로 발칸과 중근동에 점 하나씩 찍고 온 경험덕분에 완독할 수 있었다.

 

카플란이 여정을 시작한 1998년이면 아직 헝가리도 EU와 NATO에 가입하기 전이고, 발칸국가들도 구소련 붕괴의 후유증을 한참 겪고 있는 시기다.

 

두 달 전에 경험한 불가리아의 소피아는 비록 구소련의 흔적도 여전히 남아있고, 비록 역내 최빈국의 불명예스런 타이틀에도 불구하고 EU와 NATO의 우산 아래 국가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청년들의 새로운 시도를 느낄 수 있는 발전하는 국가였다.

 

아쉽게도 카플란이 여행했던 나머지 국가들은 지난 20년 동안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와 달리 운이 좋지 못한 것 같다.

다음에 중근동을 여행할 기회가 생기면 (스탈린, 그리고 내가 잘몰랐던 걸물 세바르드나제의)조지아와 아르메니아를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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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9쪽

 

자유민주주의 승리를 확고히 하기 위해선 아직 준비도 안 된 어설픈 사회에 선거를 강요할 게 아니라 파이프라인과 방위 조약들을 통해 그 지역 특성에 맞는 경제, 군사적 힘을 제공해주는 것이 우선 순서일 것이다.(중략)
21세기 근동 지역은 수단 방법에 관계없이 일단은 국가 자체의 생존이 선결 과제이다. 카스피 해 파이프라인을 둘러싼 전쟁, 곧 닥쳐올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의 충돌, 반독재하 러시아의 쇄도, 아사드 이후 시리아의 불안전, 그루지야의 혼란,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 두 나라가 나토에서 제외되는 경우 - 농촌 지역의 경기 침체 등 이런 것들이 내일 신문의 머리기사를 장식하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61쪽

 

터키를 위한 진정한 민주화와 지방분권을 옹오하는 유일한 정치 세력은 아타튀르크의 세속적 공화국을 전복시킬 기회를 엿보는 이슬람교도들밖에 없었다.

 

90쪽

 

아랍의 해방 대신 찾아온 오스만 제국의 붕괴로 아랍인들은 정치적 분쟁의 결과만을 떠안게 되었다. 그 전리품을 두고 벌인 영국과 프랑스의 대결로 대시리아는 여섯 지역으로 쪼개져 나갔다. 북부는 터키에 되돌아갔고, 팔레스타인, 트란스요르단, 이라크는 영국의 위임 통치령이 되었으며, 레바논과 시리아는 프랑스에 의해 분할됐다.

 

223쪽

 

오늘날 카프가스에는 저마다 고유한 언어나 방언을 쓰는 약 50여 개의 인종 그룹으로 이루어진 4개의 국가와 십수 개의 자치 구역이 형성돼 있다.

 

248쪽

 

나는 카프가스와 그 저 편의 세계를 통해 결과적으로는 축복이지만 소련의 붕괴가 수백 만의 인명을 어떻게 유린했는지 직접 몸으로 체험했다. 공산주의는 파괴적이긴 해도 그보다 더 나은 삶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연금, 교육, 사회적 안정, 신체적 안전을 보장해 준 사회적 제도였다. 그런데 그 시스템이 붕괴함으로써 이 곳 사람들의 삶은 더욱 더 비참한 혼란의 공백 속으로 빠져든 것이다.

 

264쪽

 

나는 발칸에서처럼 이곳 카프가스에서도 수도에서는 낙관적인 생각을 하다가도 최악의 진실은 역시 지방 도시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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