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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내가 사랑하는 사람(2008)

독서일기/시

by 태즈매니언 2014. 1. 9.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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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별, 들길, 강둑, 칼, 노을, 새.. 피라미들처럼 활개치는 시어들에 그물질하다가 낚아 올린 정호승 시인의 시 몇 편.

<밥그릇>

개가 밥을 다 먹고
빈 밥그릇의 밑바닥을 핥고 또 핥는다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몇 번 핥다가 그만들까 싶었으나
혓바닥으로 씩씩하게 조금도 지치지 않고
수백 번은 더 핥는다
나는 언제 저토록 열심히
내 밥그릇을 핥아보았나
개는 내가 먹다 남긴 밥을
언제나 싫어하는 기색 없이 다 먹었으나
나는 언제 개가 먹다 남긴 밥을
맛있게 먹어보았나
개가 핥던 밥그릇을 나도 핥는다
그릇에도 맛이 있다
햇살과 바람이 깊게 스민
그릇의 밑바닥이 가장 맛있다


<통닭>

통닭이 내게 부처가 되라고 한다
어린 아들을 데리고 통닭을 먹으러
전기구이 통닭집에 갔더니
뜨거운 전기구이 오븐 속에 가부좌하고 앉아
땀을 뻘뻘 흘리며
통닭이 내게 부처의 제자가 되라고 한다
부다가야에 가서
높푸른 보리수를 향해 엎드려 절을 해본 적은있지만
부처의 제자는커녕
부다가야의 앉은뱅이 거지도 될 수 없는 나에게
통닭은 먼저 마음의 배고픔에서 벗어나라고 한다
어머니를 죽이고 아내를 죽이고
끝내는 사랑하는 자식마저 천만번을 죽이고
이 화염의 도시를 떠나
부다가야의 숲으로 가서 개미가 되라고 한다
나는 오늘도 사랑을 버리지 못하고
땅바닥에 떨어진 돈이나 주으려고 떠돌아 다니는데 
돈과 인간을 구분하지 못하고
부동산임대차계약서에 붉은 도장이나 찍고 있는데
사랑하는 모든 것은
곧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며
플라스틱 쟁반 위에 
목 잘린 부처님처럼 가부좌하고 나오신
전기구이 통닭 한 마리


<밤의 십자가>

밤의 서울 하늘에 빛나는
붉은 십자가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십자가마다 노숙자 한 사람씩 못 박혀
고개를 떨구고 있다
어떤 이는 아직 죽지 않고 온몸을 새처럼
푸르르 떨고 있고
어떤 이는 지금 막 손과 발에 못질을 끝내고
축 늘어져 있고
또 어떤 이는 옆구리에서 흐른 피가
한강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비바람도 천둥도 치지 않는다
밤하늘엔 별들만 총총하다
시민들은 가족의 그림자들까지 한집에 모여
도란도란 밥을 먹거나
비디오를 보거나 발기가 되거나
술에 취해 잠이 들 뿐
아무도 서울의 밤하늘에 노숙자들이 
십자가 못 박혀 죽어가는 줄을 모른다
먼동이 트고
하나 둘 십자가의 불이 꺼지고
샛별도 빛을 잃자
누구인가 검은 구름을 뚫고
고요히 새벽 하늘 너머로
십자가에 매달린 노숙자들을
한 명씩 차례 차례로 포근히
엄마처럼 안아 내릴 뿐
사진: 저녁별, 들길, 강둑, 칼, 노을, 새.. 피라미들처럼 활개치는 시어들에 그물질하다가 낚아 올린 정호승 시인의 시 몇 편.

<밥그릇>

개가 밥을 다 먹고
빈 밥그릇의 밑바닥을 핥고 또 핥는다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몇 번 핥다가 그만들까 싶었으나
혓바닥으로 씩씩하게 조금도 지치지 않고
수백 번은 더 핥는다
나는 언제 저토록 열심히
내 밥그릇을 핥아보았나
개는 내가 먹다 남긴 밥을
언제나 싫어하는 기색 없이 다 먹었으나
나는 언제 개가 먹다 남긴 밥을
맛있게 먹어보았나
개가 핥던 밥그릇을 나도 핥는다
그릇에도 맛이 있다
햇살과 바람이 깊게 스민
그릇의 밑바닥이 가장 맛있다


<통닭>

통닭이 내게 부처가 되라고 한다
어린 아들을 데리고 통닭을 먹으러
전기구이 통닭집에 갔더니
뜨거운 전기구이 오븐 속에 가부좌하고 앉아
땀을 뻘뻘 흘리며
통닭이 내게 부처의 제자가 되라고 한다
부다가야에 가서
높푸른 보리수를 향해 엎드려 절을 해본 적은있지만
부처의 제자는커녕
부다가야의 앉은뱅이 거지도 될 수 없는 나에게
통닭은 먼저 마음의 배고픔에서 벗어나라고 한다
어머니를 죽이고 아내를 죽이고
끝내는 사랑하는 자식마저 천만번을 죽이고
이 화염의 도시를 떠나
부다가야의 숲으로 가서 개미가 되라고 한다
나는 오늘도 사랑을 버리지 못하고
땅바닥에 떨어진 돈이나 주으려고 떠돌아 다니는데 
돈과 인간을 구분하지 못하고
부동산임대차계약서에 붉은 도장이나 찍고 있는데
사랑하는 모든 것은
곧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며
플라스틱 쟁반 위에 
목 잘린 부처님처럼 가부좌하고 나오신
전기구이 통닭 한 마리


<밤의 십자가>

밤의 서울 하늘에 빛나는
붉은 십자가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십자가마다 노숙자 한 사람씩 못 박혀
고개를 떨구고 있다
어떤 이는 아직 죽지 않고 온몸을 새처럼
푸르르 떨고 있고
어떤 이는 지금 막 손과 발에 못질을 끝내고
축 늘어져 있고
또 어떤 이는 옆구리에서 흐른 피가
한강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비바람도 천둥도 치지 않는다
밤하늘엔 별들만 총총하다
시민들은 가족의 그림자들까지 한집에 모여
도란도란 밥을 먹거나
비디오를 보거나 발기가 되거나
술에 취해 잠이 들 뿐
아무도 서울의 밤하늘에 노숙자들이 
십자가 못 박혀 죽어가는 줄을 모른다
먼동이 트고
하나 둘 십자가의 불이 꺼지고
샛별도 빛을 잃자
누구인가 검은 구름을 뚫고
고요히 새벽 하늘 너머로
십자가에 매달린 노숙자들을
한 명씩 차례 차례로 포근히
엄마처럼 안아 내릴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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