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가 한승혜님 덕분에 여러 번 들었던 이름인 이슬아 작가님. 이 분의 서평집을 읽게 되었다. 겨우 백 페이지 남짓에 문고판이라 잔뜩 의구심을 품은 상태로 책을 폈는데.
한 페이지로 된 서문을 읽고는, 팔짱 낀 불신자는 털썩 주저앉아 무릎을 꿇고 바로 신도가 되었다.
서평이 이런 경지를 보여줄 수 있구나. 양팔을 수평으로 벌리고 발바닥을 교차시키면서 깨금발로 기우뚱거리며 평균대 위를 겨우 걷는 아이가 서커스의 줄타기 공연을 보는 느낌? 수록된 서평 중 긴 글들이 더 좋았다. 경향신문에 실린 서평들이 원래 쓰고싶었던 분량으로 쓰여졌더라면 어땠을까?
이런 서평이 있는 세상에 내가 썼던 픽션에 대한 감상들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예수천국 불신지옥' 찌라시처럼 사람들의 현관문과 발밑에 붙어 구겨지는 게 마땅한 쪽글들이.
심지어 이슬아 작가님이 서평을 쓴 18권의 책 중에서 내가 읽어본 책은 <전태일 평전>과 <백년 동안의 고독> 두 권 뿐이었는데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소개된 책들 중에서 양다솔 작가의 <간지럼 태우기>는 온라인 서점에서 서지정보가 검색이 안되는 독립출판 에세이였다. 한남동 블루스퀘어에 있다는 '다시서점'에서 판매한다니 가봐야지. 교보에서도 구할 수 없는 책이 있었던 시절의 애타는 마음을 까맣게 잊었구나.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을 읽고
[운동과 바람] - 나카노 노부코의 <바람난 유전자>를 읽고
두 편이 특히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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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쪽
만약 돈을 아주 많이 벌게 되면 시간을 선물하고 싶었다. 나에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아프거나 슬프면 일을 쉬어도 되는 시간을 말이다.
78쪽
요즘엔 이른 아침마다 책을 읽는다. 최선을 다해 사수하는 매일의 피크닉이다. 본격 근무가 시작되기 전에 이 일과를 누려야 하루를 좋은 마음으로 보낼 수 있다. 좋은 마음이란 내게 부과된 업무량에 괜히 억울함을 품지 않는 상태다. 쉬지 않고 일을 하면 나는 고마움을 모르는 인간이 된다. 그때의 내 모습은 정말 최악이다.
124쪽
검증된 팩트와 공공연한 증거가 없더라도 다음 문장을 이어갈 수 있는 글쓰기를 하고 싶었다. 약간의 거짓말을 보탬으로써 더 예리하게 진실 쪽을 가리키고 싶었다.
127쪽
지금까지 내가 변형해온 이야기들의 원형은 모두 내가 각별히 여기는 무언가였다. 각별하기 때문에 나를 황홀하게 만들고 아프게도 만들고 치사하게도 만드는 것들 말이다. 날것 그대로 공개할 수도 없고 아무 거짓말이나 함부로 보탤 수도 없다. 어떤 부분은 꾸며내야만 그 이야기가 품은 진실이 더 안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다.
Whony Kim, 유정곤, 외 113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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