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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범] 파산(2014)

독서일기/경영(한국)

by 태즈매니언 2020. 7. 30.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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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오 겐의 에세이를 읽고서 느낀 이물감때문에 한때 연매출 100억 원에 직원 120명이 일하던 회사(지금 기준으로도 연매출 100억과 상시근로자 숫자가 100명이 넘으면 중견기업인데 하물며 15년 전 숫자다)의 CEO셨던 페친 이건범님의 파산과 신용불량자 생활, 다른 진로를 찾는 과정에 대한 경험담과 복지에 대한 소회를 담았다.

 

넘쳐나는 성공스토리에 비해 파산한 기업가의 회고록은 참 드물다. 더구나 파산의 원인과 과정, 파산을 준비하는 경영자가 해야할 일들을 이리 상세하게 알려주는 책이 또 있을까? 파산법 사건을 다루고, 개인회생팀을 꾸리는 변호사들은 잘 알겠지만 실무를 안하는 나는 전혀 몰랐던 내용들이 많았다.

 

저자 이건범님과 다른 분들이 누누히 말씀하듯 성공은 상당부분 '운'이라는 우연적인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 회사를 경영하다가 그러한 운을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려울 때, 최대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책임감있게 폐업한 경험담은 법인 설립을 통한 창업을 생각하는 분들이라면 꼭 읽어봐야 하지 않을까?

 

몇 달 후 자기 앞으로 수십 억원의 연대보증 채무가 올 상황에서 회사에서 일하는 병역특례요원이 군대로 끌려가지 않도록 다른 회사를 알아봐주고, 체당금제도로 체불임금의 일부라도 먼저 받도록 직원들에게 자신을 고용노동부에 신고하라고 해야 하는 CEO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이건범 선생님께서 83학번 惡과 선배님이다보니 좀 더 각별하게 읽었는데, 혹시 사회학과말고 경제학과 출신이셨다면 기업을 키워야한다는 열망에 굳이 소명의식이 들어갈 필요도 없고, 스스로 악덕자본가가 되지않을까 저어하며 과도하게 경계할 일도 없었을텐데 안타까웠다.

(故김진균 교수님 같은 분은 존경하지만 요즘 사회학자들이 하는 무식한 소리들이 언론에 자주 노출되다보니...)

 

전두환 정권 치하의 한국에 대학생으로 사셨던 자의 상흔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그리고, 눈 건강이 온전하셔서 동시대의 책이나 인터넷 화면들을 좀 더 자유롭게 접하실 수 있으셨다면... 이런 생각이 여러번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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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서문 중)

 

실패의 기록은 쓰기 어렵다. 성공의 기록은 성공한 현재가 있기 때문에 구성이 쉽지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물거품을 원래 모양대로 재구성하기란 보통 일이 아니다. 더구나 기록을 남겨야 할 사람의 마음이 갈가리 찢긴 상태일 테니 더더욱 진도 빼기가 어렵다. 그런 이유로 실패를 기록하는 사람이 드물고, 그래서 실패의 기록을 찾아보기도 쉽지 않다.

(중략)

성공하는 사람이 극소수고 실패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지만, 위와 같은 까닭으로 사람들은 그런 실패의 경험으로부터 배울 기회를 잡기 어렵다. 기록조차 찾기 어려운 것이다.

 

196쪽

 

회사 문을 닫을 때 사장들이 흔히 선택하는 방법은 금융권과 채권, 임금 등을 모두 모른 체하고 돈 될 만한 물품을 헐값에 팔아넘긴 뒤 현금을 들고 외국으로 튀는 거다. 그게 아니라면 모든 자산의 소유권을 배우자나 다른 가족의 이름으로 절묘하게 넘긴 뒤 만세를 부르는 거다. 배 째라고. 내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몇 있었다. 그 강심장에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사실 그런 사람들은 겁이 많아 그런 짓을 벌이는 거다. 정면으로 자신의 밑바닥 인생을 마주할 용기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우리 곁을 떠나고 어느새 기억에서도 사라진다. 이 사회에서 그가 해놓았던 모든 일은 다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그의 이름 석 자도 사라지고 만다.

 

197쪽

 

난 몰려 폐업하는 사장들이 일반적으로 꼽는 순위와는 정반대로 채무 문제를 처리했다. 맨 먼저, 물건을 사온 거래처의 매입채무와 용역 나갔던 일에 대한 미지급금을 갚았다. 그들은 나를 위해 사업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들의 기업, 그들의 인생을 위해 일을 해온 사람들이다. 나 때문에 황당한 피해를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 다음으로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한 채무는 체불임금이었다. 직원들은 어쨌거나 한 배를 타고 여기까지 왔고 회사의 사정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거래처들보다는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내 처지나 회사의 상황을 이해해줄 수 있고 일말의 책임도 공유해야 한다.

 

209쪽

 

부끄러움이란 대개 상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걸 나쁘게 여길 때 일어나는 감정이다. 그러므로 내 마음을 다스리려 애쓰기보다 먼저 상대의 헛된 기대를 무너뜨리면서 내 참모습을 보여주면 내 마음속의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그리고 그 순간만 지나면 상대방이나 나나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236쪽

 

1998년부터 학술진흥재단으로 교수 평가가 일원화되면서 젊은 학자들이 대중서를 쓸 수 없는 악조건이 만들어져 있었다. 학술지에 싣는 논문만으로 거의 모든 평가 점수를 받아야 하는 반면 대중서 출간은 평가 점수에 전혀 반영되지 않는 구조였으니, 정년을 보장받지 못한 학자들로서는 대중서 집필에 엄두를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러니 사짜들의 잡서가 창궐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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