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의 이 소설은 겨울을 나기 위해서 말라붙은 이파리까지 떨구어 내고 딱딱해진 겉거죽을 두른 채 소복히 쌓인 눈을 외투삼은 나무들처럼 담백하다. 유행가 가사에서 젓갈처럼 삭혀지는 '사랑'과 '희망'에 대해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젊음이 사그라든 그 옹이지고 느릿한 할머니의 손가락으로 쓴 '사랑'과 '희망'이란 글자가 아스라이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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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쪽
나와 인연이 닿아서 내 생애 속으로 들어온 온갖 허섭스레기들의 정체를 명확히 들여다보려면 돈이 다 떨어져야 한다. 그러니 돈이 떨어진다는 일은 얼마나 무서운가.
87쪽
나무의 줄기에 늙은 세대의 나이테는 중심 쪽으로 자리잡고, 젊은 세대의 나이테는 껍질 속으로 들어서는데,중심부의 늙은 목질은 말라서 무기물화되었고 아무런 하는 일이 없는 무위의 세월을 수천 년씩 이어가는데, 그 굳어버린 무위의 단단함으로 나무라는 생명체를 땅 위에 곧게 서서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
175쪽
군인들의 밥은 짜지도 싱겁지도 않았다. 그 밥은 음식으로서의 표정이 없었고, 재료의 맛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203쪽
세밀화는 개별적 생명의 현재성을 그리는 일이지. 그 안에 종족의 일반성이 들어 있거든. 그래서 수목원은 세밀화가 필요한 거야. 그게 원리나 개념으로는 파악이 안 되잖아. 힘든 일이지. 지난한 일이야.
240쪽
그 아이들의 시각이 몸 전체의 관능으로부터 분리되지 않기를 나는 바랐다. 미술대학에서 공부할 때 나는 붓을 쥐는 나 자신의 감각이 그처럼 종합적이고 신체적인 것이기를 바랐는데, 아이들이 그런 감각을 갖기를 내가 소망할 수는 있지만, 그 감각을 아이들에게 가져다줄 수는 없었다.
273쪽
나물을 말리면, 그 맛과 향기의 풋기가 빠진다. 말린 나물은 맛과 향기의 뼈대만을 추려서 가지런해지고 맛의 뼈를 오래 갈무리해서 깊어진다. 데치거나 김을 올리면 말린 나물은 감추었던 맛과 냄새와 질감의 뼈대를 드러내는데, 그 맛은 오래 산 노인과 친화력이 있을 듯 싶었다.
337쪽
꽃들의 색은 저절로 비롯되는 것이며 연구자는 그 저절로의 과정을 들여다보고 있다. 저절로 되어지는 것을 말하는 일은 저절로 되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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