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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 외갓집과의 작별

아무튼, 농막

by 태즈매니언 2021. 10. 24. 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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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농막>

 

89화 : 외갓집과의 작별

 

며칠 전 제 외할머니께서 96세를 일기로 별세하셨습니다. 1920년대에 태어나셔서 혼인 후 농가에서 일곱 남매를 키우셨고, 열네 명의 손주들에게 한결같은 애정으로 대해주셨던 분입니다.

 

모처럼 제주도로 가족여행을 가려고 김포공항으로 가는 중이던 외사촌동생이 예약을 다 취소하고 바로 내려왔더군요. 그렇게 ‘한실’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는 이들이 모두 모였죠.

 

발인하는 날 이른 아침엔 살짝 비가 내리면서 쌍무지개가 떴고, 선산의 하늘은 더없이 쾌청했습니다.

노제로 들른, 오랜만에 찾은, 그리고 이제는 사는 사람이 없어지게 된 시골 농가주택인 외갓집 구석구석을 눈에 담았습니다.

부모님은 맞벌이하셨고, 주산학원이 면내의 유일한 학원이던 시골이라 학교에서 오전 수업 마치고 집에 오면 심심해서 30분 이상(체감 시간 한 시간 이상+가는 길에 공동묘지 있음!)을 걸어서 외갓집에 가서 놀다 올 때가 많았습니다. 동생들도 같이 가곤 했지만 손위인 제가 외갓집을 가장 많이 갔었죠.

 

무화과, 단감와 홍시, 석류, 살구, 돌배, 대추나무까지 온갖 과일나무들이 있던 자리. 몸이 가벼우니 제가 슬레이트 지붕 위로 올라가서 열매를 따왔던 앵두나무가 있던 자리. 옛날에 있다가 죽은 나무들 자리까지 기억이 나네요.

 

고약한 냄새에 아이의 몸으로는 자세잡기도 힘들고 발판 사이로 똥통에 빠질까봐 무서웠던 재래식 화장실. 덩치는 크지만 한없이 순한 곱디 고운 눈의 소가 살던 외양간. 그 밑에서 주기적으로 강아지들을 낳았던 ‘복순이’들이 살았던 툇마루. 지독한 모기들의 본거지인 대나무밭은 지금도 남아있고요.

 

푸드덕거리던 장닭이 무서웠지만, 비좁은 입구라 허리를 잔뜩 굽혀야 하는 어른들 대신 (대나무 뼈대에 지푸라기와 황토를 이겨서 만들었던) 닭장 안에서 댤걀을 꺼내오면 칭찬을 들었죠. 제가 기억하는 제일 맛있는 계란찜도 먹을 수 있었고요. 밤에 닭들이 요란스럽게 울어대면 혹여나 족제비가 구멍을 파는게 아닌지 외할아버지와 같이 손전등을 들고 들여다보러 갔었습니다.

 

외할머니께서 저희들 백숙 만들어주신다고 닭을 잡아서 손질하시던 야외 수돗가. 그 옆에서 저는 뛰놀던 닭이 고기가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봤고요. 이른 아침이나 저녁 때 마을 앞쪽 저수지를 한 바퀴 돌면 물가로 올라온 우렁이를 잡을 수 있다는 걸 배워서 한 냄비 가득 잡아온 다음 세숫대야에 넣어놓고 우렁된장국을 먹기 위해 2-3일간 뻘흙을 빼던 자리기도 했습니다.

 

쪽대를 가지고 개천에 가서 잡아온 민물고기나, 넓은 마당 오른쪽에 있던 샘에 사는 가재를 잡아서 마당에서 지렁이를 찾아먹던 닭들에게 던져주면 환장을 하고 달려들었죠. 옹달샘은 나중에는 오리들 수영장이 되었던.

 

매년 처마 밑에는 서너 쌍의 제비들이 집을 지었고, 외할아버지께서는 똥이 떨어진다고 투덜거리시면서도 집받침을 만들어주셔서 벌레들을 잡아오는 부모제비와 입을 벌리고 아귀다툼하는 새끼들을 한참 구경했습니다.

 

시골 농가주택에서는 열 살도 안된 꼬마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았습니다. 타작이 끝난 콩대에서 떨어진 메주콩 낟알이나 머릿기름으로 비싸게 팔리는 동백씨를 주워오면 칭찬해주셨죠. 외할머니께서 바쁘실 때는 소죽을 쑤어주는 야외 아궁이 앞에 앉아서 불이 꺼지지 않게 콩대나 들깨대를 넣어주면서 메뚜기나 방아깨비를 구워먹었고요.

 

외할머니께서 밭에 일 나가셔서 김매기를 하실 때 영지버섯이 어떻게 생겼는지 배워서 주변에서 큼직한 자연산 영지버섯을 따서 칭찬들었던 기억도 납니다.

(아무래도 외할아버지는 집을 어지르고, 쌓아둔 나락 안으로 파고들어가 술래잡기하며 무너뜨리거나, 가축들 못살게 구는 개구쟁이 손주들을 혼내시는 역할을 담당하시다보니)

 

이처럼 외갓집이 시골 농가주택이었기에 누릴 수 있었던 추억들을 많았는데,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셔서 저와 사촌들이 마지막 ‘한실’세대고, 다 같이 모여서 놀았던 외갓집이 영영 사라졌다는 걸 받아들이기 쉽지 않네요.

외갓집에 살고 있는 백구가 장례차를 따라서 선산 장지까지 따라오네요. 이제 이 녀석은 어디로 가려나.
제가 태어날 무렵에 완공한 저수지와 멀리 보이는 여자만 바닷가.

제가 다른 아재들보다 상대적으로 일찍 주말 농막을 꿈꾸게 된 원인 중 어릴적 외갓집에서 느꼈던 추억들(일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께서 다 해주시고 저는 놀고 먹기만 했으니까요.)에 대한 그리움이 크겠죠.

 

저는 외갓집의 추억을 물려줄 자손들이 없을겁니다. 대신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주말농막에서 기분좋게 시간을 보내고 가도록 외할머니께서 제게 베풀었던 마음의 백에 하나라도 닮아보려 합니다.

옛날엔 훨씬 넓은 한실 우물 겸 공동빨래터였는데 이젠 작게 흔적만 남았네요. 샘 바가지로 생이새우들 꽤나 잡았는데.

그러니 주말에 벽돌을 쌓아야죠.

 

(90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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