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페북에서 논란이 있었던 칼럼에 대한 비판에 대해 불편한 부분이 있었지만, 예전엔 흔했었고, 지금도 길거리의 침이나 가래처럼 잊고 살다 싶으면 마주치게 되는 일들을 다시 떠올리게 한 사람에게 본능적으로 짜증스러움과 두려움의 감정을 느끼는 여성분들의 글에는 40대 한남인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오죽하면 저렇게까지 쓰실까" 이 말 뿐이죠. 여성분들의 그런 메시지가 칼럼을 쓰신 분에게도 충분히 전달되었길 바랍니다.
아마 그 분들이 책을 찾아보실 일은 없으실테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이게 '빻은 한남'의 글인지 한 번만 좀 봐주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몇몇 구절들을 발췌해서 올려봅니다.
저는 경향신문에 연재되었던 <쇳밥일지> 시리즈를 모두 읽긴 했지만, 저자분이 겪었던 개인사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잘 모르는 개인에 대해 넷상에서 쉽사리 단정짓지 않도록 저도 계속 조심하려 합니다.
어제 본 남충현님 포스팅의 이 지적이 폐부를 찌르네요.
"직장 생활이 힘들면 그건 어떻게든 직장내에서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솔직히 우리나라에서 그게 잘 안되는거 아닌가? 그런데 그건 어떻게든 직장 문화를 개혁하든지 해서 직장이 더 괜찮은 곳이 되어야지, 직장생활은 시궁창인게 당연하니 퇴근하고 나서 가족들에게 위로를 받아라?? 이건 뭔가 단단히 잘못된거 아닌가?"
제조업 쪽으로 온 젊은 경리 직원들은 낯을 많이 가렸다. 말수도 적고 업무 외 이야기는 최대한 자제하려고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현장 아저씨들은 자기들의 행위며 발언이 실례란 사실을 몰랐다. 공유하는 언어의 세계가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아저씨들의 "애 잘 낳을 것 같네"란 말은 칭찬의 의미를 담았을지라도 여성들이 느끼기엔 그저 성희롱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어디 한국이 연하가 연상더러 불쾌감을 쉽게 표시할 수 있는 나라이던가. 결국 알아서 사리고 최대한 멀리할 수밖에 없었다.
249쪽
동생은 그 공로를 아버지에게 돌렸다. 실업고 출신인 동생은 졸업하자마자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일했다. 아버지와 하수관 청소를 나간 첫 날, 그 열악한 환경과 극악의 노동강도에 거하게 충격받았다. 이제껏 집안에서 담배 피우고 술 마시며 잠만 자기 바빴던 아버지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이런 막노동을 삼십 년 가까이 해오며 자식 둘에 할머니까지 감당해냈으니 올바른 가장 노릇 할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는 사실은 짐작할 수 있었다.
일을 시작한 그날부터 동생은 아버지와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그가 어떻게 가정의 기둥으로서 버텨냈을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원칙을 입에 달고 살았다. 원칙만 지키면 어떻게 살아도 타인에게 손가락질 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동생이 어찌어찌 인맥을 통해 병역 특례 업체에 취업한 날, 아버지는 딱 여섯 가지 원칙만 지키며 살라고 하였다. 그 원칙이 뭐였는가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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