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올해의 책으로 꼽았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을 쓰신 하재영 작가님의 이 에세이를 추천받았는데, 읽어보니 완전히 제 취향이네요. 이 책도 제 올해의 책입니다.
특정한 공간,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머무르는 공간인 집들이 내게 미친 영향들을 떠올리고, 나와 가족들의 추억과 취향을 공간들을 만들며 지내는 이야기들 속에 담긴 젠더에 대한 관점들이 남자인 저는 별 생각없이 보고 넘겨온 것들이 많더군요. 그래서 집에 대한 자전적인 에세이면서도 사회학 책처럼 느껴집니다.
1979년생 동갑에 상경한 지방출신으로 20대 시절 내내 ‘자기만의 방’을 갈구했던 기억들, 내가 점유하며 사는 공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도 닮은 꼴이라 매료되서 책 한 줄 한 줄이 깊게 다가왔습니다. ‘아르네 보더’의 디자인을 좋아하시는 거나, 책 말미에 나온 하재영 작가님의 집 사진들을 보니 저와 가구 취향도 비슷하시더군요.
본격적으로 자의식이 생기는 사춘기 이후의 개인들 모두 자기만의 방을 가질 권리가 헌법상 주거기본권이 되어서 보편적 복지로 제공되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공간을 소유하는 것은 자리를 점유하는 일이었다. ‘나는 누구인가?’하는 물음만큼이나 ‘나의 자리는 어디인가?’하는 물음이 나에게는 중요했다. 집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집에서의 내 자리’를 인식하는 일이었다.
엄마가 책을 읽는 곳은 주방 식탁이나 거실 소파같은 공동 공간이었다. 자기만의 공간을 소유한다는 것은 자기만의 시간을 확보한다는 의미다. 반대로 자기만의 공간이 없다는 것은 자기만의 시간이 언제든 방해받을 수 있다는 의미다. 엄마의 독서, 사색, 휴식은 수시로 멈춰졌다. 할머니가 집안일을 시키거나 아빠가 출출하다고 말할 때, 또는 나와 동생이 사소한 것을 요구하는 순간에.
신혼집을 방문한 손님들은 깨끗한 집을 보고 언제나 나를 칭찬했다. 남편을 칭찬했던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성격이 정말 깔끔하시네요.” 그렇게 말할 때 손님들의 시선은 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들은 집을 관리하는 사람이 나-여자-아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집이 더러워진다면, 더러운 집이 타인에게 노출된다면 나에 대한 칭찬은 나에 대한 험담으로 바뀔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집들은 내가 그곳에 살지 않았다면 지금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쓰였다. 장소를 선택하는 것은 삶의 배경을 선택하는 일이다. 삶의 배경은 사회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한 사람이 만들어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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