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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노 게이치로/양윤옥] 마티네의 끝에서(2016)

독서일기/일본소설

by 태즈매니언 2023. 2. 21.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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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노 게이치로는 데뷔작인 <일식>을 읽다가 배경지식이 너무 없어서 던져버렸었는데, 이 작품을 많이들 추천하시길래 읽어봤습니다. 작년 12월초에 故이순자 작가님의 유고집에서 단편소설을 읽은 이후로 한 권도 픽션을 안읽었거든요.
지난 몇 달 동안 제 안에서 픽션에 대한 갈증은 매일 한 편씩 무료로 열리는 웹툰 작품들과 서너 편의 100원 결제 웹소설로 채워왔거든요. 그런 기간이 오래 지속되다보니 뭔가 몸이 찌뿌둥한 것처럼 마음의 감정이 삐걱거리는 느낌이 나서 좋은 소설을 한 권 읽고 싶었습니다.
페친님들께서 극찬하시길래 샀다가 지난 몇 달 동안 침대 옆 협탁 위에서 물컵 받침 노릇을 했던 이 두툼한 소설을 집어들었을 때는 완독하겠다는 생각이 없었는데, 이 시간까지 완독하고 말았네요.
처음에는 등장인물들이 너무 TV드라마 주인공들이 가질법한 멋들어진 직업과 커리어라서 불만이 들었습니다. 직업 클래식기타 연주자가 프랑스의 하이엔드 가구 브랜드인 Ligne Roset 의자를 갖고 있는 건물주에다가 산토리홀에서 독주회에 전국 순회공연을 한다니. --; 스페인 왕립음악원 기타전공자가 동네에서 기타보습학원을 하는 한국 현실과 너무 안맞기도 하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결정적일 때 등장해서 너무 쉽게 흥미를 끄려는 것 같아서요. 등장인물들이 설정에 따라 '분재'처럼 작위적인 느낌이 드는 부분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학시절 클래식기타 동아리 회장을 했던 룸메이트 형 덕분에 클래식기타 곡들을 많이 귀동냥했던 터라 결국 몰입해서 봤습니다. 2007년부터 2012년 사이의 1966년생과 1968년생의 사랑이야기라 지금의 제 나이대와 얼추 비슷해서 였을까요? ㅎㅎ
2007년 6월 10일 빠리에서의 마티네(martinee: 낮공연), 그리고 2012년 5월 12일 뉴욕 마킨 콘서트홀에서의 마티네의 끝 곡에 대한 묘사를 보며 책을 덮으니 제목을 참 잘 지었다는 생각과 함께 간만에 인생과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기억에 남아>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네요.
매번 논픽션에 치우는 독서를 하지만 올해는 의식적으로라도 좀 더 소설을 찾아읽어봐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기억하고 싶은 아름다운 문장들이 많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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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쪽
콘서트 공연장은 음악 이전에 정적을 벽으로 둘러싸 지켜내는 장소다. 그것은 이 사회에, 아니, 자연계까지 포함하여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정적의 피난 장소다.
154쪽
새로운 재능의 출현이 반드시 항상 위협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잔혹한 것은 그 재능이 자신의 존재를 스윽 스쳐가면서 무시해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는 과연 누구를 존경하고 누구를 이어받아야 할 재능이라고 인정하는가. 그 계보가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이 그려지는 광경을 곁에서 그저 말없이 지켜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그것은 이미 자신이 몇 년 전에 시도한 것이라고 아무리 혼자 생각해봤자 세상이 새로운 재능에 대해 새롭다고 느끼면 그것은 새로운 것이다.
179쪽
이 같은 처지에서도 인간은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능력인가. 그리고 기타라는 악기의 좋은 점은 친밀함이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이토록 편안하게 노래하는 게 가능하다. 악기 자체가 연주자 자신의 체온으로 따듯하게 덥혀져간다. 하지만 거기에는 듣는 사람의 온기까지 함께 섞여 있는 것 같았다.
189쪽
인간에게 결단을 재촉하는 것은 밝은 미래에 대한 적극적인 꿈이라기보다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현재 상태에 계속 머무는 것에 대한 불안이었다.
412쪽
공연장을 찾은 관객에게 허용되는 것은 각자 좌석 한 칸 분의 작은 정적이다. 기침 하나로도 금세 찢겨나갈 듯한 그 정적을 서로서로 잘 가다듬으며 어떻게든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해나간다. 그리고 그들의 그런 적극적인 소리의 포기는 두 연주자에게 남김없이 사용 방도가 위임되어 있다.
450쪽
"그러니까 지금이에요. 잘못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지금 이 순간. 내 과거를 바꿔주는 지금 이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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