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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 캉당(2019)

독서일기/국내소설

by 태즈매니언 2023. 6. 2.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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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읽은 소설. 현대문학에서 PIN이라는 시리즈로 큐레이션한 소설가 이승우 작가님의 중편 혹은 장편입니다.
10대 시절에 인상깊었던 장편 <생의 이면>(1992)과 중단편집 <미궁에 대한 추측>(1994) 외에 <나는 아주 오래 살 것이다>(2002) 정도를 읽은 기억이 나는데, 대학교 문창과 교수로 은퇴를 코앞에 둔 최근까지도 1~2년마다 작품을 내오셨군요.
오늘 읽은 <캉당>도 인간의 믿음, 신화와 종교라는 무거운 주제에 대해 깊게 파고드는 작가님이라 생각했던 제 기억과 기대에 걸맞는 작품이었습니다.
 
대서양 끄트머리에 있는 바닷가 시골 항구에서 몇 달을 스쳐간 세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과로로 인한 이명으로 일을 할 수 없게 된 경영컨설턴트, 종말론 교단이 파송했지만 포교의지가 없어서 해임된 선교사, 고래잡이배를 탔다가 사랑에 빠져 캉당에 정착한 뱃사람, 이 셋 모두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라는 질곡에 발목이 잡혀 있고요.
 
허먼 멜빌의 <모비 딕>, 오디세우스와 세이렌, 고래 뱃속에서 사흘을 보냈던 선지자 요나,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의 이야기 등을 실처럼 엮어내는데, 인신공양 의식의 주재자와 제물의 관계, 바다속이라는 다른 세계 속에 던져져서 과거와 단절하고 새로워질 것 같은 매혹(타나토스?)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드네요.
 
신학적인 고민을 오래한 지성적인 기독교인이 만년에 사후세계에 대해 고민한 끝에 나온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전이 거대하지는 않지만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고요. 2019년에 나온 이 작품이 작년까지 6쇄나 찍었다니 다행입니다.
 
모든 걸 쓸어가며 켜켜이 쌓인 시층의 큰 압력은 속에 있는 기억들을 바스러뜨리죠. 그 막강한 시간의 힘을 생각하면 왜 사나 싶어져서 기가 죽지만, 곧 추대가 올라올 상추를 대신할 어린 모종을 보면 우주 먼지인 제 기분이 풀리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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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쪽
낯선 언어 속으로 들어가는 것, 그것은 자기를 객체로, 남으로, 낯선 이로 만드는 것과 같다. 그것은 있던, 익숙한 세계로부터 자기를 숨기는 행위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를 숨기는 행위이기도 하다. 세계는 그를 알아보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자신도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완벽한 숨음이다. 익숙한 언어는 와글거리는 숲과 같다. 와글거리는 사방의 눈을 피해 낯선 언어 속으로 들어간 사람은 모국어를 잊음으로써 과거를 잊는다. 잊기를 강요당한다. 잊기를 강요당하기를 선택한다. 친숙한 모국어가 없는 곳에서 낯선 언어로 발언하는 사람은 다만 현재를, 현재만을 산다.
169쪽
그의 문장은 완전하고 충분하게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멈추지 않고 삽질을 계속해야 한다는 의무와 굳이 삽질을 계속해서 부패해서 냄새날 것이 뻔한 그 안의 자기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욕구 사이에서 씨름하는 사람의 문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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