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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캐플런/유강은 역] 카플란의 현명한 정치가(2023)

독서일기/국제정치

by 태즈매니언 2023. 10. 5.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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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이상 해외통신원으로 일한 국제정치 저널리스트인 로버트 카플란이 올해 낸 책을 발빠르게 번역했더군요. 번역도 유려합니다.

카플란은 자신이 최악의 독재국가라고 생각했던 사담 후세인 치하의 이라크보다, 미국이 사담 후세인을 축출한 이후 무정부상태가 되어 수십 만 명이 죽어간 '해방된' 이라크가 수십, 수백 배 이상 나쁜 상황임을 직접 보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존재하지 않았던 대량살상무기'라는 결과까지 고려하면, 오피니언 리더인 자신도 사담 후세인이 축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미군의 이라크 점령이 필요하다고 뒷받침하는 리포트를 써냈거나 지지했다면 죄책감으로 우울증에 빠질만 하니까요.

그래서 카플란은 이 책에서 현실주의자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실수를 곱씹으며, 정치 지도자들이 국가간 외교문제를 다룰 때 '다루기 힘든 세계에서 악을 줄이기 위해(비극을 피하기 위해) 불안에 근거한 선견지명을 가지고 비극적으로 사고하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제가 그리스 고전 비극과 셰익스피어 문학에 대해 무지하다보니 책의 내용 중 절반 이상의 분량을 차지하는 이런 비극 문학을 인용하고 해석하는 내용은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어 아쉬웠습니다.

격동의 시대를 겪었던 이전 세대들이나 유럽출신 이민자들과 달리 낙관주의적인 이상주의 성향을 가진 미국의 베이비부머 정치인들에 대한 카플란의 불신은 <어제까지의 세계>에서 현대인들의 불안전한 상황을 알아차리는 관찰력과 이런 상황을 타개하려는 과단성이 떨어지는 부분을 개탄하며, 우리네 선사시대 조상들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재러드 다이아몬드와 비슷한 어조였습니다.

'아랍의 봄' 이후 최근까지 벌어진 사건들을 보면 아직까지도 인류는 국가가 폭력 사용을 독점할 때, 무정부 상태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경험의 틀을 깨지 못했다고 봐야죠.

카플란이 현명한 정치가의 사례로 제시하는 미국의 아이젠하워와 조지 부세 1세와 같은 정치인들이 과연 다음 번 미국 대선에서 당내 경선을 통과하고,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면, '비극을 피하기 위해 비극적으로 사고하는 정치인'을 갖지 못하는 점은 서방 민주주의 진영의 리스크로 남을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권위주의 진영이 이런 정치인을 잘 뽑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니고, 권위주의 진영은 이 부분에서는 랜덤뽑기라고 봅니다.)

잘 읽긴 했지만 카플란 역시 WEIRD(친민주당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지식인이고,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는 다른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보는 국제정치 리더쉽을 접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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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비극은 도덕적으로 옹호할 수 있지만 양립할 수 없는 목표들에 관한 이야기다.

46쪽

삶의 경험 또는 그 경험의 부족은 여러 세대의 학자들을 계속해서 규정한다. 내가 쓴 글들이 조금의 가치라도 갖는다면, 그것은 내가 섭렵한 책들만이 아니라 해외 통신원으로 직접 겪은 여러 장소와 상황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냉전 시대의 폭압적인 동유럽 공산주의 정권들, 1990년대 라이베리아와 시에라리온의 혼돈, 20세기와 21세기 시리아와 이라크의 폭정과 혼돈 등등이 그것이다. 특히 혼돈은 바로 눈 앞에서 속이 뒤집어지는 그 현실을 겪어보지 않는 이상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83쪽

오늘날 우리는 카다시안의 요란함과 트럼프 대통령 시절의 타락이 판칠 뿐만 아니라 의식이 퇴색된 시대에 살고 있다. 정부와 노동, 종교에서, 그리고 사회적, 성적 관계에서 위계가 무너지고 제도가 약화되는 시대다. 물론 위계는 불공정하고 억압적일 수 있다. 하지만 위계를 해체하면 새롭고 더 공정한 위계를 세울 책임이 생긴다. 질서의 문제가 여전히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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