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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솔아] 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2021)

독서일기/국내소설

by 태즈매니언 2023. 11. 4.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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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생계를 걱정할 필요가 없거나, 주양육자가 벌어오는 돈에 의존해 살면서 자아실현하거나 세상 걱정하는 화자가 나오는 소설들을 보기 싫더군요.

소설 <최선의 삶>으로 처음 알게 되었던 임솔아 작가이 전업작가라는 어려운 길을 택해서 2020~21년 코로나19 시기에 글로 생계를 꾸려나가면서 발표한 단편들입니다.

화자와 등장인물들이 거의 다 여성입니다. 남성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희끄무레한 중성의 배경처럼 느껴졌습니다. 소위 '정상가족'이 거의 안나오기도 하고요.

저는 이 단편집 중에서 세 편이 특히 좋았습니다. 첫째, 국내 빌라(다세대주택)에서의 주거 경험을 소재로 한 <내가 아는 가장 밝은 세계>, 둘째, 누군가의 죽음을 가까이서 목격한 경험의 트라우마와 이해에 대한 <희고 둥근 부분>, 셋째, 웹툰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이 생각나게 하고, 다른 단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한데 나오는 작품인 <마피아는 고개를 들어 서로를 확인해주세요>는 몇 년 이상 소규모로 오래 지속되어온 젠틀한 커뮤니티 활동에 대한 각자의 속마음과 엇갈린 기억들을 소재로 합니다.

임솔아 작가님이 묘사한 한국사회에서의 인간관계나 거래문화를 보시면 좋겠어요. 남들에게 바라는게 많고, 내가 뭘 원하는지 솔직하게 말하지도 못하고 서로 눈치를 보는 답답한 고맥락사회. 공기를 읽지 못하거나 통용되는 기준에 못미치면 가차없이 탈락시키는 경쟁문화에 세계에서도 가장 앞서나가는 소위 '핵개인' 시대까지 결합된게 한국이 아닐까요?

이 단편집을 다 읽고 나니 한국인들의 생애주기에서 가족을 비롯해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맺음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게 암담하긴 합니다.

저는 임솔아 작가님 외에 이혁진, 김혜진, 하재영님이 내는 책들을 볼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습니다. 네 분 모두 한승혜님의 서평덕분에 알게 된 분들이네요.

시간의 더께에서 살아남은 고전들을 읽으면 실패할 확률은 적겠지만 이렇게 2020년대 초반 한국사회의 모습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는 수작들을 놓칠 수밖에 없습니다.
(사놓고 책탑만 쌓다가 도서관에서 빌려와서야 다시 책을 읽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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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쪽 <내가 아는 가장 밝은 세계>에서

박 부장은 친구에게 청약 당첨 전략을 짜주었다. 이번 청약에는 해당되지 않겠지만, 곧 분양을 시작할 2단지 모집 공고문이 게시되기 전에 임신을 하라고 했다. 태아도 아이로 인정이 되기 때문에, 임신만 한다면 당첨 가능성을 확실하게 높일 수 있다고 했다. 임신을 확정받으면 직장은 바로 그만두라고 했다. 맞벌이를 하면 소득이 높게 잡혀서 당첨이 불가능하다는 게 이유였다.

156쪽 <마피아는 고개를 들어 서로를 확인해주세요>에서

나는 책에 밑줄을 긋는 것을 무척이나 경계합니다 밑줄을 긋는 순간, 그 문장은 책 바깥으로 튀어나와버립니다. 어느 문장이 나의 손과 물리적으로 관계를 맺고 책으로부터 멀어져 나에게 성큼 다가와버리는 것만 같습니다. 어쩌면, 나는 그 문장을 밑줄이라는 것으로써 포획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밑줄은 어딘가 사냥과 닮았습니다.

163쪽 <마피아는 고개를 들어 서로를 확인해주세요>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게 싫은 건 아니에요. 성의 없게 수업을 하는 것도 아니에요. 최선이 반복되어도 매번 같은 자리에 서 있다는 것뿐이에요. 서 있다는 표현이 제게는 정확해요. 교사는 서 있는 직업이니까요. 제가 서 있는 동안 현재도 서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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