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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진] 불과 나의 자서전(2020)

독서일기/국내소설

by 태즈매니언 2023. 12. 2.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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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혜진님의 아담한 중편입니다. 제가 <딸에 대하여>(2017), <9번의 일>(2019), <너라는 생활>(2020)을 읽은 후 업데이트가 전혀 안되고 있었는데 올해까지 일년에 단독 저서로 1~2권씩 계속 펴내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시네요.

<너라는 생활>에서도 저자가 도시 속에서 부족한 경제력으로 자기가 살 공간을 마련하는 어려움과 더 헐한 곳으로 밀려나지 않으려는 악다구니를 감내해야 하는 피로함에 대해 잘 포착했다고 생각했는데, 이 <불과 나의 자서전>은 그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네요. 실화와 너무 겹쳐보여서 아쉬웠던 <9번의 일>보다 훨씬 매료되었습니다.

제가 읽은 올해의 소설 후보로 올려봅니다.

김혜진 작가님이 1983년생이던데 저도 걸쳐있는 이 즈음 세대의 부모님들이 도시에 자가소유 주택을 마련했는지, 마련했다면 어디에 마련했는지의 여부는 상당부분 개발정보와 사금융을 통한 자금융통의 행운, 거래의 기술이나 집요하게 관철해낸 악다구니에 힘입은 바가 큽니다.

하지만, 늦어도 1990년 중반 무렵에(IMF 너무 직전이면 안됨) 자가소유 주택마련이라는 사다리에 올라탔는지 여부에 따라 그 자녀들의 삶에 상당히 영향을 미쳤고, 그게 한국사회의 역동성이 떨어진 손자녀 대에 와서는 겨우 30년 전의 작은 차이에서 시작된 계급의 간격이 훨씬 멀어져버렸지요.

김혜진 작가의 이 소설은 많지 않은 분량으로 이 흐름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주인공의 어머니와 주인공의 친구이자 홀어머니인 주해씨의 노력은 다를게 없는데, 안전하고 남한테 무시받지 않은 집을 가지기 위한 거리는 더 멀어진 느낌입니다.

저 역시 직급이 하나 내려가는 걸(요즘보다 하위직 공무원의 승진기간이 훨씬 길었던 시절에 말이죠.) 감수하고 전남에서 광주로 전출입을 결행해주신 어머니 결심과 자녀 셋을 키우면서도 제가 사고싶다고 한 책들을 아낌없이 사주시면서도 내 집 마련을 이뤄낸 부모님이 아니었더라면 과연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요?


(나름 또래라 생각하니 편애하는 마음을 살짝 얹어서) 김혜진 작가님은 보배같은 소설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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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홍아, 너는 이 동네 애들과 달라. 가게 하는 부모들이야 가게 문 닫을 때까지 애들을 기에서 놀게 내버려둔다지만 너는 그렇지 않잖아. 학교 갔다 와서 애들이랑 노는 건 좋아. 그래도 다섯 시 전에는 집에 와서 씻고 숙제도 하고 일기도 쓰자. 약속할 수 있어? 엄마랑 약속해.
그날 밤 어머니가 살며시 내 곁에 누워 달래듯 그렇게 소곤거렸을 때 나는 그러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왜인지 동네 아이들과 늦게까지 어울리는 나를 볼 때마다, 나를 다그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어머니의 마음 안을 조금 엿본 기분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117쪽

수아가 보잖아요. 애가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모르겠어요. 뭐든 하게 돼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다 알 수는 없었습니다. 다만 그렇게 말하는 주해에게서 오래전 내가 목격했던 어머니의 모습이 잠깐씩 겹쳐졌습니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당시에는 결코 알 수 없었던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139쪽

뭐가 옳고 뭐가 그른지 나도 몰라서 이러는 게 아니에요. 홍이 씨, 나도 홍이 씨처럼 수아 키우고 싶어요. 옳다, 그르다. 언제든지 그런 걸 따질 수 있는 사람으로 키우고 싶다고요.
수아를 나처럼 키우고 싶다는 그 말의 의미를 나는 오래도록 알지 못했던 게 틀림없습니다. 그게 내가 아니라 내가 사는 중앙동을 염두에 둔 말이라는 것을, 그게 네가 남일동에 살았다고 해도 그렇게 모든 걸 명명백백하게 따질 수 있느냐는 질문이라는 것을, 나는 시간이 훨씬 더 지난 뒤에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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