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이화경]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2023)

독서일기/국내소설

by 태즈매니언 2023. 11. 29. 21:32

본문

 
어느 각도로 표지를 찍어도 빛 아래서는 프리즘처럼 전등 빛을 분광해서 반사하는 재질이군요. 조도를 낮추고 찍었더니 뿌옇게 안개가 낀 시계탑 풍경처럼 보입니다.
<2022년 출판시장 통계>에 따르면 DART에 공시보고서를 올리는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23개 단행본 출판사의 매출 합계는 4,629억 원으로 전년대비 1.4% 감소하였고, 23개 회사 중 2/3 이상이 전년보다 매출액이 감소했다고 하네요.
가구당 월평균 서적구입비가 전년보다 8.3% 감소한 10,294원이라는데 코스닥 잡주의 주가처럼 퇴락한 느낌입니다. 납본된 출간도서가 6만 종이 넘으니 나오는 책들은 많은데 책을 읽는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특히 이런 단편소설집을 읽고 공감할만한 50~60대의 소설 독자층은 얼마나 얇은지 저는 그 두께감을 가늠하기 어렵네요.
글쟁이로 50대 이상까지 살아올 정도로 어느 정도 입지가 있는 작가라면, 차라리 문체부나 공공기관, 지자체의 지원사업들의 제안서를 쓰며 사람들을 만나고, 상근자 한 명 없지만 거창하게 열 글자 이상인 이름의 사단법인이나 사회적협동조합 같은 걸 만들어서 사업계획서를 쓰는게 더 나을 겁니다. 최소한 지역신문 문화면에 행사소식이나 자신의 인터뷰기사가 실리고, 글을 쓰려는 열의가 있는 젊은 친구들에게 기회를 나눠주고, 생계를 돕는다는 충족감도 줄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욕심도 안내고 그저 글로써 꾸준히 새로운 시도를 하며 주변사람들을 관찰하고 이야기를 들어주며, 지역에서 무관심에 방치된 벼랑에 선 지역사람들을 돕는 작가는 사람들이 책을 사고 읽어주지 않으면 언제까지 계속 이야기를 지어서 들려줄 수 있을지 답답한 마음이 드는군요.
아마 저보다 좀 손위인, 이화경 작가님 또래인 독자라면 <모란,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그리고 내가 내 곁을 지나갔다>, <비누가 우물에 빠진 날>같은 단편들에 깔린 회한의 정서를 공감하리라 생각합니다. 평균적으로 주어진 수명의 반절 이상을 살아온, 반쯤은 짐승처럼 생존을 위해 발버둥처야 했을 정도로 강퍅했던 시기를 경험했던 이들은 공감할 수 있는 너울같은 울림을요.
현해탄에 몸을 던졌던 윤심덕-김우진이 아닌 남겨진 김우진의 아내를 주인공으로한 <노라의 本>, 고려가요 쌍화점의 가사에서 모티브를 얻어 고려 개경의 기생이 주인공인 <앵혈, 꾀꼬리의 피>는 남성작가들의 시선으로 포착하기 힘든 단편 역사소설이고요.
다만, 표제작이자 권두작인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가 너무 난해하다고 느껴졌습니다. 좀 찾아보니 1922년에 나온 김소월의 시집 <<진달래꽃>>에 실린 <개여울>이란 시의 서두에 나오는 문장으로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라는 제목을, 중간에 나오는 문장을 따서 표제작의 제목으로 삼으셨더군요.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는 꽤 많이 살아왔는데 아직도 상당히 남은 중년 이후의 시기를 도무지 어떤 목적과 방향으로 살아가야할지 갈피를 못잡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줬다고 느꼈습니다. 작품의 제목인 PPT 슬라이드 두 장이 등장하는 건 재미있었고, 사자성어 작취미성(昨醉未醒: 어제 마신 술이 아직 깨지 아니함)이 영화 <동사서독>에서 '취생몽사(醉生夢死 : 아무 뜻 없이 한평생을 흐리멍덩하게 살아감)의 변용같았고요. 하지만, 한국의 중년 남매의 이름으로 '엘제'와 '한스'라는 독일쪽 이름이 함께 등장하니 현실감이 알콜처럼 증발되는 느낌이 들더군요. 단편 안에서 등장하는 독일의 라푼젤(이 소설 덕분에 독일어로 '들상추'란 뜻이라는 걸 알았네요.)설화와의 연결고리를 제가 찾아내지 못해서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것 같습니다.
----------------------------------------
131쪽,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중에서
맞고 사는 게 슬퍼서 가출했다. 세상은 가출한 소년에게 퍽도 다정하게 훈계질을 했다. 집으로 돌아가거라. 집 나오면 개고생이란다. 가출한 소녀는 순식간에 발라당 까져서 문란해지고, 소년은 세상의 질서를 생까는 양아치가 될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댔다. 가출한 소년소녀들이 얼마나 가족에 매달리는지 모르고들 하는 소리였다. 오죽하면 가출팸이 시도 때도 없이 만들어지겠냐고. 얘들은 시한폭탄같은 핏줄들이 있는 씨족공동체 가족이 아니라 서로에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존재로 품어주는 다정한 공동체 가족을 꿈꾸었다. 그런 가족은 영화 세트장에나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무엇보다 돈 문제가 걸리면, 서로의 등짝을 보일 새도 없이 흩어지곤 했지만.
170쪽, <그리고 내가 내 곁을 지나갔다> 중에서
온전치 않은 비릿한 합의, 성치 않은 씁쓸한 결론, 돌려받기를 요구하지 않는 어떤 목숨......
시골 전원의 고즈넉한 풍경의 비주얼 뒤엔 늘 어둠의 심연이 도사리고 있음을 집성촌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할퀴고 지나간 다음에야 조각조각 부서진 든 자리가 보이는 거센 바람의 보이지 않는 무서움, 저물녘의 술래잡기처럼 숨은 누군가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같은 것......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