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김연수] 너무나 많은 여름이(2023)

독서일기/국내소설

by 태즈매니언 2023. 12. 5. 22:13

본문

 

한밤중에 잠에서 깼는데 다시 잠들것 같지 않아서 김연수 작가님이 올해 출간한 단편소설집까지 읽게 되었습니다. 결국 새벽까지 완독하고 말았고요. 작가소개의 사진을 보니 글근육이 달리기와 운동에서 나온 게 느껴질 정도로 완전 몸짱이시네요.

 


2021년 제주의 작은 서점에서 했던 낭독회 이후로 짧으면 10분, 길면 한 시간 이내로 사람들에게 읽어줄 수 있는 단편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낭독이 끝난 후 낭독회에 참석한 분과 눈빛을 마주치며 그분들의 이야기를 청해들었던 경험이 김연수 작가님에게 전환점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1970년생이시니 오십대 중반이기도 해서 예전같으면 시간이 아깝도 불편해했을 행사가 달리 느껴지신게 아닌지.

이 단편집을 읽으면서 하나하나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주제라면 '인생을 다시 한 번 살 수는 없지만, 내 삶의 발자취들이 다음에 살아갈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느꼈습니다.

요즘은 보편적인 인생에서 관계맺음 단계들이 희미해지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김연수 작가님은 듣는 사람이 불쾌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고 은근하게 서로 사랑을 해서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키우고 늙어가는 삶의 방식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네요.

<젊은 연인들을 위한 놀이공원 가이드>과 <우리들의 섀도잉>, <위험한 재회>가 연애권장편이라면 <첫여름>, <보일러>, <토키도키 유키>, <나와 같은 빛을 보니?>는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갖는 것이 삶에 주는 의미를 부드럽게 보여줍니다.

<여름의 마지막 숨결>은 반쯤 짐승의 시기인 남자 중학교 시절을, 표제작인 <너무나 많은 여름이>는 저자가 사람들에게 꼭 강조하고 싶은 메시지를 아우구스티누스가 남긴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가 좋아하는 것을 하라.'라는 말을 반복해서 다소 직설적으로 제시합니다.

이 책에서 제가 가장 좋았던 작품은 <거기 까만 부분에>였습니다. 수학여행을 갔다가 목숨을 잃은 안산 세월호 사망 학생들을 생각하며 썼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개인들이 그들을 어떻게 추모해야할지(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당하지 않고) 깊은 고민이 있었기에 나올 수 있었던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낭독회를 염두에 두고 쓴 단편들이라 각 작품마다 추천곡들이 있고 유튭 플레이리스트까지 있습니다.

 



-------------------------------------------

113쪽 <젖지 않고 물에 들어가는 법> 중에서

소설가는 몰라도 되는 세계를 인식함으로써 그 세계를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니 글쓰기는 인식이며, 인식은 창조의 본질인 셈입니다. 그리고 창조는 오직 이유 없는 다정함에서만 나옵니다. 조지 오웰이 광부들의 세계에 대해 말한 것도 다정함 때문입니다. 타인에게 이유 없이 다정할 때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 새로 만들어지면서 지금까지의 삶을 플롯이 바뀝니다. 그러면 지금 이 순간 가능성으로만 숨어 있던 발밑의 세계가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136쪽 <풍화에 대하여> 중에서

언젠가 시각장애의 본질은 보지 못한다는 게 아니라 보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라는 문장을 읽은 적이 있는데 나이듦의 본질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감각능력이 점점 떨어지는 것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타인의 감각 대상에서 멀어진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감각 대상에서 멀어지면 모든 존재는 사라지게 되어 있었다.

235, 238쪽 <거기 까만 부분에> 중에서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저는 실제로 그 아이들과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머문 적이 있는 거잖아요. 그건 엄청난 관계성이에요. 어쩌면 그 아이들이 아니라 제가 죽을 수도 있었던 거잖아요.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었는데, 결국 그 아이들이 죽고 저는 살아 있는 세상만이 현실이 됐어요. 그래서 저는 이 현실에 책임감을 느껴요."
(중략)
오래 노출시킨 카메라의 사진에 훨씬 더 많은 별들이 있다. 기계적으로 더 섬세한 덕분에 카메라는 핸드폰보다 더 많은 별들을 사진에 담은 것이다. 말하자면 카메라 쪽이 더 많은 별들을 존재할 수 있게 한 셈이다. "누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어떤 별은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거예요."라고 연구원은 말했다. "그러니 포기하지 않고 계속 바라보는 것, 그것이 관찰자로서의 책임감이 아닐까요."라고도 덧붙인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