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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선] 한국인의 탄생(2023)

독서일기/한국정치

by 태즈매니언 2024. 1. 7.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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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선 작가님은 서사를 엮어 하나의 이야기로 뽑아내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여러 책들을 쓰셨는데, 성공적인 유목제국인 예케 몽골 울루스를 만들어낸 테무진의 일생을 다룬 <테무진 to the 칸>이 가장 유명하지요. 딴지일보에서 사진과 지도가 포함된 게시글로 읽은 사람이 너무나도 많아서 정작 책은 많이 안팔린 비운의 작품이죠.
저는 그 책을 유목제국 정치사상사 교양서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사상사를 꼭 전공학자들의 대학교재 느낌의 딱딱한 책으로 볼 필요가 없다는 점을 알려준 책이죠.
이번 책도 썰이 많지만 참고문헌 목록을 보면 황당무계하다고 무시할 정도는 아닙니다. 고조선을 다룬 앞부분에서 그렇게 느낄 수도 있지만, 최근 KBS에서 방영 중인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으로 교양을 쌓으셨다면 중간쯤부터는 '한국인의 탄생'이라는 제목에 공감하게 되시리라 믿습니다. '민족은 이야기 위에 세워진다.'는 관점에 동의하신다면요.
동북아 중국 바로 옆에 붙은 반도에서 연교차가 크고 험준한 산지 사이사이에 있는 비좁은 평야에서 생태적 한계선 근처에서 벼농사를 지어야 했고, 거대한 인구대국인 중국과 인구를 가축으로 대신할 수 있었던 유목민족들과 마주쳐서 수천 년 동안 망하지 않고 정체성을 유지해온, 인구도 식량도 가축도 부족했던 한민족 분투기를 다루다보니 읽으면서 찡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구답지 못한 한국을 훈계하는' 흔해빠진 먹물들과 달리 지리의 중요성과 경제학적인 합리성에 기반하면서도 인간 정신의 힘을 존중하는 관점의 탁월한 이야기꾼이라는 점에서 임명묵 작가의 중국/러시아에 관한 책과 통하는 부분이 많고요. 조선을 오백 년 동안 지속된 소비에트 왕국으로 보는 관점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ㅋㅋ
홍대선 작가님이 1978년생으로 제 또래 X세대이지만, 풍부한 독서와 독창적인 관점으로 파고들며 '남들이 통념으로 생각하는 지점을 포착해서 좋은 질문을 던지는 분'이라 차기작으로 예고된 한국현대사 책도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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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쪽
한국의 산성 전투는 산성 바깥에 있는 자신의 재산을 공평하게 없애는 청야에서부터 시작한다. 외적이 물러간 후 스스로 파괴한 삶의 기반을 복구하려면 농번기 때처럼 '품앗이'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억지로라도 서로를 믿어야 한다.
83쪽
배후 산성은 한반도 주민과 왕조의 특이한 사고방식을 담고 있다. 산성이 일부러 둘러싸이는 구조라는 점에서, 여느 산성처럼 현지 주민과 군부대 장병들뿐 아니라 국가 자체도 퇴로를 차단하고 멸망 직전까지 산성 방어를 하겠다는 관념을 보여준다. 이 순간에는 최고위층 엘리트 집단도 일반 주민과 운명을 함께 한다.
148쪽
유목 전사들은 한반도 왕조와 주민이 중국 보병과 나눈 교훈을 알지 못했다. 고려는 유목 제국에도 같은 교훈을 주입해야할 운명에 놓였다. 그 상대는 거란이었다.
182쪽
원칙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정작 필요한 순간이 오면 의외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백제인인 내가 어째서 고려의 졸병이 되어 말 타는 오랑캐 놈들한테 돌격해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법한 순간에는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력으로 나라를 세워놓고도 관념적인 건국의 원리를 만들기 위해 머리를 짜내왔다.
196쪽
동아시아의 역사는 실패한 제국들의 무덤으로 가득하다. 현종은 송, 요에 뒤진 3등 제국 대신 1등 왕국이 되기로 했다. 1등 왕국이 어느 나라에 입조하는지에 따라 현재의 진정한 천자국이 결정된다.
248쪽
신진사대부는 신기하게도 민중의 고통에 공감했다. 이것이 철학의 위대함이자 이념의 힘이다. 조선은 이념 국가다. 현재까지 역사에 이름을 남긴 국가 중 조선과 가장 비슷한 체제는 단언컨대 소련(소비에트 연방)이다.
276쪽
전근대 국가에서 지배층이 절제하고 남은 결과물은 모두 백성의 영양 상태가 된다. 앞서 나온 표현을 반복하자면 한국인은 '가장 길다란 황인종'이다. 한국인은 유전적으로도 키가 크지만, 영양의 도움 없이 형질이 발달하지는 않는다.
314쪽
예송논쟁의 진정한 의미는 논쟁이라는 점에 있다. 붕당 투쟁은 말과 글로 벌이는 내전이다. 전투에 백성들이 동원되지 않는다. 일반적인 내전은 전쟁 비용과 노동력, 병력을 백성으로부터 빨아들인다. 조선의 정치투쟁은 백성의 삶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진행되었다. 비록 승리자 중에서 백성을 착취하는 인간들이 나오긴 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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