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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천] 아파트 게임(2013)

독서일기/한국경제

by 태즈매니언 2014. 2. 19.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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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진부한 주제가 되어버렸지만 아파트에 관심을 가진 디자인 연구자가 '비평적 픽션'이라는 실험적인 방식으로 쓴 한국 중산층의 역사라고 할만한 책. 각 세대별로 가상의 화자가 등장하고 그의 삶의 궤적을 압축해서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긴 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글이 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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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쪽

한국만의 독특한 민간 임대 제도인 전세 제도는 호황기에는 부동산 시장의 최전방 공격수인 다주택 보유자에게 유동성을 공급하는 '미드필더'로 대활약을 펼쳤다. 일종의 '사금융'이나 다름없던 이 제도는 불황이 닥치자 재빨리 후방으로 되돌아가 '최종 수비수'로 전환한 뒤 가격 하락세를 온몸으로 막아내고 있다. 그러니 이런 표현도 가능하지 않을까? 아파트 시장의 진정한 '리베로'라고 말이다. 결국 이 제도 덕분에 보유자에게 가야 할 가격하락의 압력, 은행으로 가야 할 부실 대출의 압력 상당 부분이 내 집 마련을 포기한 젊은 세대의 세입자들에게 전가되고 있다. 아주 이상한 방식으로 고통 분담이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188쪽

사실 이에 대한 예측은 별로 어렵지 않다. 저출산 세대의 생애 주기에 맞춰 내수 소비 시장, 노동 시장, 주택 시장 등을 차례대로 들락거리며 사회 전반을 뒤흔들어놓을 테니까 말이다. '각성한 인간들'도 바꾸지 못한 세계를 '줄어드는 인구'가 가뿐다니. 이 얼마나 흥미로운 미래이며 멋진 신세계인가? 나는 들끓는 호기심으로 상기되었다. 정말 하루라도 빨리 관찰자의 무정한 시선으로 그 미래가 현실이 되는 광경을 지켜보고 싶었다. 그러나 흥분의 시간도 잠시뿐, 이내 나에게 그런 구경꾼의 자리가 허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그 때가 되면 내 아들이 30대 중반의 나이에 될 것이기 때문이다.

213쪽

일반적으로 데이터베이스의 구축은 자료 그 자체에 대한 물신적 소유욕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지만, 종종 그 자료가 구성해낼 수 있는 정보의 자기 완결적 체계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 변곡점에서 양질 전환의 촉매로 등장한 것이 바로 패턴 알고리즘이었다. 여기에서 패턴 알고리즘이란 소년들이 데이터베이스의 자료들에 대한 호불호의 판단을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습득하는 차이의 '식별 규칙'을 의미했다. 이런 규칙들이 차곡차곡 쌓이다 보면, 취향도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드물긴 했지만 패턴 알고리즘은 상징 처리의 인지적 기제로 진화해, 데이터베이스로부터 특정한 형태의 서사를 추출하거나 새로운 의미의 차원을 통해 기존의 데이터베이스를 해체, 재구성하기도 했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 데이터베이스 없는 패턴 알고리즘은 불가능했던 반면, 패턴 알고리즘 없는 데이터베이스는 가능했다. 

228쪽

흥미로운 점은 386세대에 속한 국내 작가 일부가 하루키의 캐릭터들에 넋을 읽고선 그와 유사한 캐릭터들을 국산화하려고 시도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런 계획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캐릭터들은 하루키에게는 이미 경험해 본 과거였지만, 그들에게는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근 미래였기 때문이다. 즉 하루키에게는 후일담의 대상이었던 것이 그들에게는 SF의 소재였던 것이다. 
(중략)
언젠가 일본작가 시마다 마사히코가 선배 세대에 속하는 하루키를 일컬어 "자기 세대의 이야기는 못 쓰고 그보다 어린 세대의 독자들이나 유혹하는 작가"라고 경멸어린 어조로 비꼰 적이 있었다.

275쪽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세계'와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갖춰야 하는 세계', 이 두 세계에양다리를 걸치는 것이야 말로 큐브의 나이 든 세입자들이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터득한 삶의 지혜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바로 욕망의 크기에 반 뼘 모라자는 선택을 거듭한 뒤, 그렇게 모은 반 뼘들로 구매력을 충전해 한 뼘을 초과하는 무언가를 구입하는 것 말이지요. 큐브 번화가의 고급화는 이런 소비의 습속을 지닌 비혼 30대 거주자들이 늘어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276쪽

한편 정보화 시대를 주도하는 첨단 IT산업도 성장을 위한 핵심적인 시장 중의 하나로 큐브를 주복했다는 말씀도 덧붙여야겠네요. 사실 정보 서비스업은 인터넷과 무선망을 통해 사용자에게 가상의 방을 제공하는 사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포털, 게임, 공유 등 각종 서비스를 통해 여러분의 두 눈과 컴퓨터 사이에 혹은 스마트폰 터치스크린 사이에 정보의 방을 제공해주는 것이지요. 물론 그 방은 업체의 기술력과 여러분의 감각이 합작해서 만들어낸 가상의 방입니다. 일종의 증강현실이라고 할까요. 여러분이 이 방이 제공하는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보고 들으면서 '재미'라는 감정의 흥분상태를 만끽하는 동안, 정보 서비스 업체들은 그 대가로 여러분의 '시간'을 챙깁니다. 이 시간이 여러분이 지불하는 임대로인 셈이지요.

사실 '창조 경제'라는 것도 이런 맥락에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큐브의 공식 입장에 따르면, 창조 경제란 각종 첨단 IT기술을 총동원해 구매력이 현저히 낮아진 젊은 소비자 집단의 '시간'을 현금화하는 방법을 고안해내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의 비즈니스 모델을 창출해내려는 일련의 시도를 통칭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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