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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사실주의 동인]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2023)

독서일기/국내소설

by 태즈매니언 2024. 9. 22.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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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하지만 동시대 평범한 한국인들의 돈 벌어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 쓰는 작가 동인을 모아 이렇게 단편집을 내고자 한 기자 출신의 '쓰는 사람' 장강명 작가님의 의지에 공감하고, 이 동인의 단편집을 계속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보다 많은 인력과 자본이 투자된다는 차이도 있지만, 왜 요즘 사람들이 소설보다 웹소설, 웹툰, 유툽이나 OTT 영상을 보는 더 많이 보는 이유 중 하나를 이 소설집이 짚고 있다고 봐서, 제 올해의 소설 후보로 올려봅니다.

요즘 쓰레드(페북 70%+인스타 30% 같은)의 짤막한 글들 속에 이런 이야기들이 많아서 종종 보는데, 페이스북을 광고 쓰레기통으로 만든 저커버그가 쓰레드에 사람이 어느 정도 모이면 똑같이 할 것 같아서 옮겨갈 마음은 안들고, 이렇게 잘 쓴 단편소설로 읽는 호사와는 좀 다르니까요.

전반적으로 다 훌륭한 작품들이었지만 여러 일하는 현장에서 있을 법한 모습들을 패치워크처럼 가져다붙인 작품들보다는 하나의 일터에 집중해서 내부자들만 알 수 있는 한탄스러운 모습들을 풍자한 작품들이 제 취향에 더 맞았습니다.

보도나 도시공원, 공개공지 등 공용공간에 누구나 잠깐 쉬어갈 벤치나 퍼걸러가 없어 돈을 내고 잠깐 앉을 공간을 찾아야 하는 방문 학습지 교사와 40년된 아파트의 주차공간 문제를 다룬 서유미 작가님의 <밤의 벤치>, 구로와 금천구 디지털단지(지식산업센터)에 흔한 소규모 IT회사의 식대 지급과 관련된 관리직 팀장의 회사생활을 소재로한 이서수 작가님의 <광합성 런치>, 지방에서 서울로 이직한 30대 직장인이 후줄근한 원룸 전세를 벗어나 아파트로 이사가고자 좌충우돌하는 모습을 통해 지난 5년 동안의 부동산정책으로 토끼몰이 당한 젊은 수도권 회사원들의 분노와 좌절을 잘 보여주는 정진영 작가님의 <숨바꼭질>, 육아를 어느 정도 끝내고 통번역대학원을 나와 프리랜서 번역사와 번역담당 회사원으로 일하는 일상에 대한 최영 작가님의 <이해와 오해가 교차하는 방식>처럼요.

특히, 저를 빵터지게 한 임성순 작가님의 <기초를 닦습니다>가 최고였습니다. 자기가 살 단독주택을 직접 발주하기 위해 일류 건축설계사무소에서 일하던 건축사가 주로 주택을 짓는 소규모 시공사로 이직해서 다세대주택(빌라) 신축공사의 현장소장을 맡아 해보면서 왜 건축설계사무소 선배들이 집짓지 말고 그냥 아파트 분양받아 들어가라고 말렸는지 실감하게 되는 구성과 묘사의 디테일이 웃프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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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기획의 말을 대신하여>(장강명)

중산층이 무너지고 있다. 몇몇 천재들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나 부동산에 매겨지는 가격은 가파르게 상승하는데 성실한 노동의 가치는 추락한다. 플랫폼과 인공지능이 노동시장을 흔든다. 일에서 의미나 보람을 찾는다는 사람은 드물다. 이런 현상들을 '자본가 대 노동계급'이라는 과거의 틀로 파악하고 대처할 수는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나는 저 현상들의 한가운데 있으며 그 현상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원인도 모르고 대책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 고통에 대해서는 쓸 수 있다. 후대 작가들은 알 수 없는 것, 동시대 작가의 눈에만 보이는 것도 있다. 스타인벡도 통화 긴축이 대공황을 불러왔다거나 재정지출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얘기를 소설에 쓴 것은 아니었다. 이런 마음으로 기획안을 쓰고 작가들을 모았다.

126쪽 <광합성 런치>(이서수)

상사는 결국 부하 직원에게 경멸받을 짓을 하게 된다. 조직에 충성하려는 태도가 그런 결과를 낳고 만다. 동료들의 식탁에 무얼 차려낼지가 자신의 손에 달린 것처럼 기고만장하다가도 그들의 입에 들어가는 걸 낚아채 회사 곳간으로 다시 가져다놓는 그악스러움에 스스로 치를 떨었다.

144쪽 <기초를 닦습니다>(임성순)

현장에서 일하며 깨닫게 된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 반년동안 가장 크게 배운 것은 다름 아닌 예산에 대한 감이었다. 설계를 하며 이런 디테일에 이런 자재를 추가하면 얼마나 공기가 늘고 예산이 늘어나나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었다. 당시엔 자신이 예산에 맞춰 설계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현장에서 일을 해보니 실은 시행사 측에서 그 예산에 맞춰 만들어주고 있는 것이었다. 사소한 설계 변경이 일으키는 변화는 실제로는 간단하지 않았다. 숫자 너머에 훨씬 복잡한 방정식과 이해관계의 외줄 타기가 있었다.

285쪽 <오늘의 이슈>(지영)

배는 부른데 허기지는 날들이 쌓이면서 깨달았다. 별로인 곳에서 일하는 나 역시 별로였고, 너무 달라붙은 관계는 삐걱거릴 때가 더 많았다. 이곳에서 어떤 친절은 배려의 반의어였고, 어떤 고립은 구원의 동의어였다.

316쪽 <이해와 오해가 교차하는 방식>(최영)

대학원 동기는 어차피 이 년 계약직으로 있다가 떠날 회사인데 괜히 인생 아깝게 몰입하지 말고 자판기처럼 지내라고 다정씨에게 조언했다. 하지만 가만히 있는 자판기를 사람들이 한 번씩 발로 찬다는 게 문제였다.
번역은 느리고도 깊은 작업이라는 것.
그래서 말로 옮기는 통역과 달리 순발력보다는 정교함이 훨씬 더 요구되고 작업 시간도 월등히 많이 걸린다는 사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둘의 차이를 알지 못했고, 번듯한 스펙을 자랑하는 이 곳 직원들도 그 점은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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