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한여름 장마처럼 폭우가 오더니 오늘도 안개비가 부슬부슬 내리는군요. 할 일이 있어 밭에 왔습니다. 우선 양배추와 브로콜리를 심은 틀밭에는 배추벌레가 창궐하고 있네요. 죄다 뜯어먹히고 잎맥만 남은 모종도 있을 정도라 보이는 족족 잡아서 닭 먹이로 공급해줬습니다.
(첫 사진 두 장 벌레 주의)
3월에 태어나서 입양된 산란계 암탉이 지난주 초란에 이어서 본격적으로 알을 낳기 시작하네요. 원래 처음에 낳는 알색상이 좀 진하고 점차 연해지더라구요. 아직은 알둥지에 안낳고 치킨런 바닥 여기저기에 뿌려놨더라구요.
팔남매 중에 암탉이 반절 이상은 되어주길 그렇게 바랬건만 자라는 벼슬과 체구를 보니 8마리 중 6마리는 수탉이어서 중국 농촌처럼 망한 성비였습니다. 이래서 처음에 백봉오골계와 청계는 암탉만 분양받은거였고요.
이미 블랙 마란을 키웠을 때 좁은 우리(가축사육제한 구역 내 닭장 크기 제한이 10제곱미터 이하라)안에서 수탉이 세 마리일 때 도망갈 공간이 없다보니 가장 덩치크고 사나운 수컷들이 같이 자란 형제들을 쪼아서 한 마리씩 죽이는 꼴을 봤었는데 말이죠. 그리고 수탉 변성기가 오는 시기가 되자 산란계 수컷들도 여지없이 약한 수컷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요즘 산란계들은 태어날 때 암수에 따라 병아리 색깔이 다르게 나오는 품종을 키우기 때문에 병아리 감별사가 불필요해졌다던데 암평아리만 입양해올 수 없는 상황에서 부화기를 이용해서 병아리를 부화시키면 이렇게 남는 수컷들이 서로 쪼아 죽이기 전에 어린 수탉들을 처리해야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애완닭 커뮤니티에서는 항상 수탉을 나눔하거나 저렴하게 분양하는 글이 올라오죠. 장닭 한 마리가 암탉 10~20마리를 거느리니까요.
이번에 산란계를 입양받으면서 수탉들이 여러 마리가 되면 서로 죽이기 전에 제가 닭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지난달 생방송 투데이 영상을 찍은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닭을 직접 잡게 되었고요.
물론 수탉을 잡아서 케이지에 담아 닭을 잡아주는 시장 가게에 가면 바로 닭을 잡고 70도의 뜨거운 물을 부어 닭털 뽑는 기계에 1분을 돌리고, 내장 등을 손질해서 받아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2016년에 읽었던 일본 르포작가 우치자와 준코씨의 <그녀는 왜 돼지 세 마리를 키워서 고기로 먹었나>를 떠올리며 제가 직접 수탉을 도계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지금까지 40년 이상 고기를 먹어온 사람으로서 제가 그렇게 좋아하며 먹었던 고기가 어떻게 식탁에 오르는지 직접 새끼부터 가축을 키우고 죽이고, 손질해서 먹어보는 경험을 한 번은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키우는 닭고기를 먹고서 어쩌면 채식주의자들을 이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기껏해야 어릴 적에 개구리를 잡아 뒷다리를 구워먹거나, 아버지한테서 배운대로 낚시로 잡았던 30~40cm 길이의 물고기 내장을 손질하고 비늘을 쳐봤을 뿐이긴 했습니다. 그래도 어릴 적에 손주들 요리해주신다고 외할머니께서 키우던 닭을 잡아 손질하시는 모습을 몇 번 봤으니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번 달에 6마리의 산란계 수탉들 중에서 5마리를 도계했습니다. 처음에 한 마리를 잡을 때는 숫돌에 간 칼로 심장을 찌르고 뜨거운 물에 담근 채로 닭털을 뽑고 반으로 갈라 내장을 정리하는데 무려 한 시간 반이 넘게 걸렸습니다. 조류라고 하지만 근위(모래집)과 위의 차이 외에는 장기구조가 거의 비슷하더군요.
제 손으로 건강하게 잘 살던 지능이 높은 생명체를 죽인 경험이 처음이다보니 중간에 그만두고 싶은 마음도 여러번 들었지만 결국 다 끝냈지요. 처음 잡은 닭은 대전에 사시는 이모 내외께 드렸고, 이번 달에 2마리씩 두 번 더 잡은 수닭은 이웃 김선생님과 신선생님께 드렸습니다.
우치자와 준코 작가님은 이름까지 붙인 세 마리의 돼지를 마을사람들과 잡아서 직접 맛보고 고기 맛에 대해 평까지 하셨던데, 이름을 안붙이고 키웠는데도 제가 잡은 닭을 직접 요리해 먹는 경험까지는 내키지가 않아서 결국 못하겠더군요.
산란계 세 마리만 남은 단촐한 닭장에 신선생님께서 병충해가 생겨서 뽑아낸 배추를 넣어주는 제 자신이 위선자 같았고요.
그래서 시골에서 유정란을 부화시켜서 닭을 키우실 분이라면 수탉을 잡아야 하는 상황을 감당할 수 있는지 미리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없으시다면 달걀 받는 용도로 암탉들만 사와서 키우시는 편이 좋습니다.
제가 키우고 싶은 품종은 버프 오핑턴이긴 한데 이런 경험을 또 해야한다고 생각하니 자신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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