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보면 반납기한의 압박때문에 빨리 읽게 되긴 하지만 저는 보고싶은 책은 사서보는 걸 좋아합니다. 그래서 도서관을 자주 가는 편은 아니고요.
하지만 도서관에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 연속간행물자료실에서 이달의 다양한 잡지들을 보는 거죠. 제가 생각하는 부자의 지표 중 하나가 아무런 고민없이 보고싶은 잡지 연간구독을 신청할 수 있는지 입니다. 과월호 없는 잡지를 표방하는 <매거진 B>같은 예외도 있지만 대부분의 잡지는 과월호를 처분하게 되니까요.
건축잡지 <공간>말고 조경전문 월간지 <환경과 조경>을 오늘 처음 알았네요. '보이지 않는 조경'을 추구하시는 JW랜드스케이프 사무소의 원종호 조경가님의 인터뷰와 소개된 조경작품들이 제 취향이라 매혹되네요.
성수동의 흔한 지식산업단지의 폭 5미터, 길이 100미터 가량의 공개공지를 사람들이 잠시 쉬어가고 싶은 공간으로 만드신 걸 보면서 세종시 대로변 상가 공개공지의 시베리아처럼 황량한 현실과 비교되서 한숨이 나네요. 이렇게 건물주, 지자체와 조경가의 노력에 따라 충분히 좋아질 수 있는 여지가 많은데 말이죠.
서비스업인 조경설계업에서 클라이언트가 입구에 큰 장승을 하나 놓기를 원하고, 실제 공간감과 상관없이 화려한 CG 처리한 발표자료가 먹히는 상황에서도 '관습과 타성을 최소화하여 작업하고자 하고, 자신들의 작업이 또 다른 관심이 되는 걸 경계하는' 태도가 참 보기 좋았습니다.
합천군 황매산 군립공원은 가보지 않았는데, 이 분들이 꾸민 공간을 실제로 가서 눈으로 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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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쪽
발주처(합천군)의 목적은 많은 돈을 들여 지역 경제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관광 자원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특별한 테마나 가시적 디자인 대신 기존 공간 요소를 깨끗하게 빼고, 대상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황매산의 풍경을 산 입구에 표현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발주처는 상당히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는데, 황매산이 아닌 다른 어떤 것도 경관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의견을 주장하며 그들을 설득했다. 이외에도 콘크리트, 석재, 철재 등의 소재를 활용하고자 했다.
하지만 발주처는 야자매트, 황토 등 일반적으로 등산로에서 사용하는 자연 소재를 왜 지양하는지, 콘크리트나 철 같은 도시적이며 인공적인 재료를 자연에 쓰는 걸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돌, 철, 콘크리트의 자연스러운 풍화가 시간이 지나면서 주변의 경관과 자연스럽게 어떻게 하나가 되는지 이야기하며 설득했다. 나아가 저렴한 매트, 황토길, 발파석 쌓기 등 소위 자연적이라 여기는 재료나 공법이 긴 시간이 지난 후 어떻게 비루해질 수 있는지 다양한 사례와 이미지를 통해 설명했다. 결국 받아들여지긴 했으나 발주처는 의심의 눈초리를 쉽게 거두지 못했다.
완공 후 1~2년이 흐른 뒤 그들은 당시 우리가 이야기하고 의도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직접 목격했고, 요즘도 가끔 황매평원 사진을 우리에게 보내온다.
황매산 프로젝트의 핵심은 황매산의 전경을 입구부에서 압축적으로 볼 수 있도록 만드는 거였어요. 대상지에 총천연색의 시설물과 흔히 볼 수 있는 포토존 조형물이 많았어요. 이런 것들만 덜어내도 이곳은 좋아진다고 합천군을 설득했죠. 더하는 조경이 아닌 빼는 조경을 한 셈이죠.
(중략)
입구부뿐만 아니라 황매산 군립공원 전체에 대한 마스터플랜을 세우고 구역마다 상세한 가이드라인을 설정하는 작업을 진행했어요. 이 구역에 데크를 놓을 때는 오일 스테인을 바르지 말 것, 이 구역에는 플라스틱을 사용하지 말 것, 이 구역에는 유채색을 쓰지 말 것 하는 식으로요.
63쪽
어떤 공간이 양질의 공간이라고 인지되는 첫 번째 순간은 눈에 거슬리는 것이 없이 반듯하고 깨끗하게 떨어진 풍경을 마주하는 때라고 생각해요. 가장자리가 깔끔하고, 포장이 균질하고, 무언가 엇나간 지점 없이 말끔하게 떨어지는 느낌을 주는 게 중요해요. 설계 자체도 중요하지만 작은 디테일의 마감 완성도가 공간의 질을 좌우하는 순간을 많이 목격했어요. 그랫 디테일에 힘을 많이 주는 편입니다. 도면만 봤을 때는 별거 없다고 느낄 수 있지만, 그 속에는 땅과 시설물이 만나는 부분, 높이 차가 나는 땅이 연결되는 부분을 깔끔하고 정확하게 처리하는 방법이 녹아들어 있어요. 조형 아래 숨은 설계 원리가 공간의 완성도를 결정한다는 신념이 있습니다. 화려하지만 디테일이 조악한 공간을 지양합니다.
65쪽
(원종호) "학교에서 보낸 몇 년 정도의 시간으로 자신의 재능을 재단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는 학교 다닐 때 한 번도 제가 설계를 잘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거든요.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 내가 설계를 못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면 안 됩니다. 열정을 가지고 노력하면 실력이 따라오게 되어 있어요. 조경설계는 압도적인 천재만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끈기만 있다면 누구나 재미있게 할 수 있는 분야에요. 자신이 평가한 실력 안에 자신을 가두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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