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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2013)

독서일기/국내소설

by 태즈매니언 2014. 4. 23.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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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씨의 신작 장편소설. 지금까지 읽는 이 분 작품이 여섯 권이고 이번이 일곱번째인데 이번 소설은 중편이라고 하는게 맞을 듯 싶다. 


존재의 의미는 부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알츠하이머에 걸려 기억을 잃어가는 살인자 노인의 이야기를 한다. 다 읽고 나니 아무리 인조 장기를 달아서 오래 살려고 발버둥치더라도 뇌의 해마가 퇴화되는 인간이 걸어갈 길은 변화가 없겠구나 싶더라. 


메멘토 모리, <왕좌의 게임>에서의 '발라 모르굴리스'의 재발견이라고 할까나. 과거 기억과 미래 기억을 잃고 결국 예전 로터리식 브라운관 텔리비전 수상기가 꺼져가듯 전원이 나가는 터미네이터 T-1000 모습도 떠오르고. 


시간과 인간의 기억에 대한 이야기에서 불교에서의 공(空)의 개념을 이끌어온 부분이 신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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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그러므로 공 가운데에는 물질도 없고 느낌과 생각과 의지작용과 의식도 없으며,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도 없으며, 형체와 소리, 냄새와 맛과 감촉과 의식의 대상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없고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으며,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늙고 죽음이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없어짐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으니라."

22쪽

단어들이 점점 사라진다. 내 머리는 해삼처럼 변해간다. 구멍이 뚫린다. 미끌거리나. 모든 것이 빠져나간다. 아침이면 신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다. 다 읽고 나면 읽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잊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도 읽는다. 문장을 읽을 때마다 필수적인 부품이 몇 개 부족한 기계를 억지로 조립하는 기분이다. 

93쪽

'미래 기억'은 앞으로 할 일을 기억한다는 뜻이었다. 치매 환자가 가장 빨리 잊어버리는 게 바로 그것이라고 했다. 과거 기억을 상실하면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게 되고 미래 기억을 못하면 나는 영원히 현재에만 머무르게 된다. 과거와 미래가 없다면 현재는 무슨 의미일까. 하지만 어쩌랴, 레일이 끊기면 기차는 멈출 수밖에. 

98쪽

인간은 시간이라는 감옥에 갇힌 죄수다. 치매에 걸린 인간은 벽이 좁혀지는 감옥에 갇힌 죄수다.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숨이 막힌다.

114쪽

약을 먹어야 인지능력의 감퇴를 지연시킬 수 있다는데, 약을 먹는 일을 자꾸만 잊어버리니 이런 딜레마가 있나. 달력에 점을 찍으며 약 먹는 것을 챙기지만 가끔은 달력에 찍힌 그 점이 무엇인지 몰라 한참을 멍하니 달력만 보고 서 있다. 

126쪽

이런 일이 매일같이 반복된다. 그는 영원히 '제 때'에 공항에 도착하지 못한 채 공항 주변을 배회하게 된다. 그는 현재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닌 그 어떤 곳, '적절치 못한 곳'에서 헤맨다. 아무도 그를 이해해주지 않는다. 외로움과 공포가 점증해가는 가운데 그는 이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 아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변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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