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받은 책선물입니다. 그것도 여동생으로부터요. 책 선물이 드물어진 시기에 자랑할만 하죠?
저와 여동생 모두 김영하 작가를 좋아하는데, 소설보다 논픽션을 더 좋아하는 것도 같습니다. 제가 동시대 한국 작가의 소설로 거의 처음 접한 작가라 특별한 느낌이 있고요.
자기 이야기를 잘 밝히지 않는 저자가 가족사를 반추하는 자전적인 에세이네요. 1968년생이시라 헌사의 문구처럼 부모님을 모두 떠나보내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쓴 글들인 것 같습니다.
어릴 적에 부모님의 큰 기대를 받았고, 연대 경영학과에 입학했고 부모님 뜻대로 학군장교 임관을 위해 학군단 생활까지 했던 그가 4학년 여름방학 전방입소를 앞두고 학군단을 탈퇴 후 사병으로 군복무를 마쳤고, 졸업 후 PC통신에 글을 연재하다가 소설가가 됩니다.
집안의 기대에 부응하다가 '나 안해'를 시전했고, 고교시절까지는 종교에 관심이 많았지만 종교가 없으며, 서른 즈음에 이미 아이없는 삶을 선택, (단독주택에 살면서) 취미가 가드닝이고, 남자들의 서열짓기와 권위적인 조직을 싫어하는게 저랑 비슷해서 더 친근감이 생기네요.
처음 소설가로 데뷔했을 때부터 개성이 있었고, 그 이후로 항상 새로운 시도들을 해보는 모습이 좋아보였는데, 이제는 뒤를 돌아보시는군요. <스캔들이 된 고통의 의미>는 에세이의 톤에서 좀 튀는 느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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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쪽
구세주의 탄생은 그렇다고 쳐도 평범한 인간의 생일은 왜 축하하는 것일까? 그것은 고통으로 가득한 삶을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서로에게 보내는 환대의 의례일 것이다. 모두가 가고 싶어하는 좋은 곳에 온 사람들끼리 환대하는 것은 쉽다. 원치 않았지만 오게 된 곳, 막막하고 두려운 곳에 도착한 이들에게 보내는 환대야말로 값진 것이다.
생일 축하는 고난의 삶을 살아온 인류가 고안해낸, 생의 실존적 부조리를 잠시 잊고, 내 주변에 너와 같은 문제를 겪는 이들이 있음을 잊지 말 것을 부드럽게 환기하는 의식이 아닌가 싶다. 괴로움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동료들이 주는 이런 의례마저 없다면 삶이 내 의지와 무관하게 강제로 시작된 사건이라는 우울한 진실을 외면하기 어렵다.
61쪽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기대와 실망이 뱅글뱅글 돌며 함께 추는 왈츠와 닮았다. 기대가 한 발 앞으로 나오면 실망이 한 발 뒤로 물러나고 실망이 오른쪽으로 돌면 기대도 함께 돈다. 기대의 동작이 크면 실망의 동작도 커지고 기대의 스텝이 작으면 실망의 스텝도 작다. 큰 실망을 피하기 위해 조금만 기대하는 것이 안전하겠지만 과연 그 춤이 보기에도 좋을까?
137쪽
대체로 젊을 때는 확실한 게 거의 없어서 힘들고, 늙어서는 확실한 것밖에 없어서 괴롭다. 확실한 게 거의 없는데도 젊은이는 제한된 선택지 안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잘 모르는 채로 인생의 중요한 결정들을 내려야 만 한다.
무한대에 가까운 가능성이 오히려 판단을 어렵게 하는데, 이렇게 내려진 결정들이 모여 확실성만 남아 있는, 더는 아무것도 바꿀 게 없는 미래가 된다. 청춘의 불안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179쪽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본다는 것은 작심하고 꿈을 꾸겠다는 의미다. 현실이 여기 있지만 나는 문을 열고 다른 세계로 잠시 넘어갔다가 안전하게 돌아올 것이다, 라고 결심하는 것이고, 실제로도 독자를 안전하게 제자리로 돌려보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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