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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밥 먹다가, 울컥(2024)

독서일기/에세이(한국)

by 태즈매니언 2025. 7. 2.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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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님의 글들은 꼬박꼬박 찾아읽으려고 합니다. 2022~2023년에 주간지인 <시사IM>에 연재한 글들을 모은 책인데, 이런 책에 보통 박한 평가를 내리는 저인데도 이 책은 제 올해의 논픽션 목록에 올려봅니다. 올해 읽은 음식에 관한 책으로는 에드워드 리의 <버터밀크 그래피티>와 함께요.

박찬일님께서 1963년 생이라 생각보다 연세가 있으시네요. 그래서 제가 살아보지 못했던 옛날의 밑바닥 동네의 풍경과 그들이 먹고 살았던 밥벌이 방법들과 그렇게 일하며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넘겼던 음식들, 그 음식들을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들을 모아 이 책으로 펴냈습니다.

저자 소개 옆 속표지에 '그리운 것들이 사라져간다'라고 남긴 것처럼 이제는 선진국인 한국에서 거의 사라진 풍경들을 서울의 변두리나 지방도시의 재래시장, 궁벽한 시골식당에서 찾아 다큐멘터리처럼 이런 존재들이 있었다고 알려주시네요. 본인의 어린시절과 대학시절 추억들도 꽤 많이 나옵니다.

제가 세종시로 이사온게 2014년말인데, 그 직후부터 알게 되서 10년 넘게 단골로 다닌 식당이 있습니다. 세종시 금남면에 있는 '원조감자탕'이란 곳인데 국물이 맵거나 짜지 않고, 가격에 비해 고기가 엄청 많이 붙은 등뼈를 잘 삶아서 보드랍게 만들어주시고, 감자탕에 대두 콩을 갈아넣어 주시는데 주기적으로 찾아 먹게 되는 집이었습니다. 게다가 야근하고 그냥 집에 가기 아쉬울 때 뼈해장국 한그릇이 주는 위로도 엄청 크죠.

그런데, 사장님께서 얼마 전 지난 6월 28일까지만 하고 다른 분께 가게를 넘긴다고 하시더라구요. 어깨 관절이 안좋아지셔서 작년에도 두어 달 쉬셨거든요. 은퇴하실 때도 되었지요.

11년 동안 계속 마주쳐오고 만들어주신 음식을 먹어온 사이인데 사장님의 성함도 모르고, 연락처도 모르다보니 아쉬움을 담은 인사와 함께 덕담을 하고 나오긴 했지만, 뭔가 제대로 이별을 하지 못한 것 같아 지금도 아쉽습니다.

사람의 추억은 공간과 결합해서 머리 속에 각인되고, 몸과 마음에 위로가 디는 음식을 먹은 기억은 더 강렬하게 남는데, 그런 기억들을 상기시켜줄 공간들이 사라져가는 걸 느끼다보면, 그 공간에서 밥 먹다가, 울컥할 것 같습니다. 제가 6월 28일날 서울 출장을 가지 말고 원조감자탕에 가서 43페이지의 구절처럼 했어야 했는데 후회됩니다.

이 책을 통해 알게된 현악기 제작 장인 박경호님, 그리고 흔히 써왔지만 들어본 적이 없었던 '돼지 멱따는 소리'를 (유툽영상을 통해) 알게 되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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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쪽

선배에게 이런 문자를 주절거리며 보냈다.
"사라지는 노포. 마지막 날에는 모든 단골이 모여서 꽃다발도 좀 안기고, 추억의 음식도 실컷 먹고, 주인이 혼신의 힘으로 마지막 주문을 만들어내고 땀을 훔치면서 홀에 나설 때 손님들이 박수를 쳐줄 수 있는 그런 문화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폐업의 변이라도 써놓고 문 닫는 집은 드물다. 우리 사회는 이제 외면의 시대가 되었다.

112-113쪽

숯을 쓰면 당연히 고기가 더 맛있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굽는 이의 폐는 공격받는다.
일 마치고 요리복을 벗어보면 목 칼라 안쪽이 거뭇거뭇하다. 씻을 때 코를 풀면 시커멓다. 손님은 어쩌다 고깃집에서 두어 시간 숯을 대하지만, 그건 이미 잘 피워진 놈들이라 분진이 별로 없다. 게다가 아주 질 좋은, 코끼리 코 같은 연기 흡입기가 고기에서 뿜는 기름까지 삭삭 빨아들인다.
하지만 저 부엌 뒤에서 피우는 숯은 생숯이고, 탁탁 소리를 내면서 숯이 몸서리를 칠 때마다 검은 분진이 일어난다. 어느 돈 많은 고깃집에서 가게 좁은 구석에 옹색하게 설치한 숯판 위에 위력적인 배출기를 설치하겠나.
숯판에서 일하는 후배에게 내가 한 말은 고작 이랬다. 무책임한 말이었다.
"얼른 돈 벌어서 그거 때려치워라."

143쪽

요리사 모임은 야밤에 시작한다. 손님 다 가고, 결산까지 마쳐야 슬슬 옷을 갈아입을 수 있다.
(중략)
그렇게 요리사들이 모이면 아무거나 먹는다. 밤 10시 넘어 문 연 곳이 요리사 처지엔 맛집이다.

181쪽

그때는 싸구려 케첩도 귀했다. 양을 늘리려고 파는 이는 케첩에 물을 탔다. 그래서 핫도그에 뿌리면 착 붙지 않고 질질 흘렀다. 야박할수록 빨리 흘러내렸기 때문에 재빨리 핥아먹을 마음의 준비를 했다. 케첩의 농도로 우리는 핫도그 장수들의 인정머리를 매겼다. 어린애들이라고 모르지 않았다.

256쪽

"사람 살 데가 아니더라. 엄청나게 큰 배 안에서 용접하는 일을 했어. 한낮에 일하려면 죽음이야. 배는 쇠로 만들지? 그게 달궈지면 어떻게 되겠니. 달걀 깨서 올리면 바로 프라이가 된다고. 그 안에서 일하는 거야."
진규는 그 일을 '철판야끼'라고 했다. 당시 고급 요리로 인기 있던 일본식 테판야끼 같았다고. 한낮에는 배 안의 온도가 섭씨 50도를 넘는다고 했다. 그의 동료 중에는 중동 사우디아라비아로 돈 벌러 다녀온 선배들이 많았는데, 사우디보다 더 힘든 게 대한민국 조선소라고 했다.
"돈은 아주 조금 줘. 우리 회사가 하청에 하청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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