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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 종말론적 신비주의자(2013)

독서일기/서양사

by 태즈매니언 2014. 9. 15.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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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로 마키아벨리보다는 20년 정도 연배가 앞서는 제노바 출신 항해가 '크리스토발 콜롬보' 중세인과 르네상스인의 성격을 모두 지녔던 이 시대의 아이콘에 대해서 분석한 주경철 교수의 책인데 재미있게 읽었다. 


원양항해술과 인쇄술의 영향을 받았으면서 동시에 프레스터 존 류의 설화와 예루살렘 재정복과 수도사적 열정을 지닌 지극히 모순적인 인물. 그 인물을 중심으로 하여 대항해시대의 전개를 결정짓는 초기조건을 분석한 내용들이 유용했다. 사료들을 온전히 분석하고 소화해서 자기가 이해한 글로 풀어낸다는 점에서 주경철 교수의 책들은 매번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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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쪽


제노바 상인들은 흑해 연안에 진출하여 상관들을 세워 그 곳을 중심으로 교역활동을 했고, 때로는 무력 강탈도 주저치 않았다. 상업과 무력이 혼합된 이 방식은 이 시대에 보편적인 일이었다. 후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의 여러 지역에 세운 나비다드, 이사벨라, 베라구아 같은 요새는 제노바의 상관을 연상시킨다. 그는 지중해에서 배운 내용을 대세어야에서 시행한 셈이다. 


65쪽


이제 이탈리아를 비롯한 지중해 지역의 자본과 기술이 서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대서양 세계 개척의 전위인 이베리아 반도의 여러 정치체, 즉 카스티야와 카탈루냐, 아라곤, 포르투갈 등에 이탈리아의 자본이 많이 유입되었으며, 또 이탈리아 상인들과 선원들이 직접 이주해 공동체를 형성했다. 콜럼버스 형제들의 이주는 예외적인 사건이라기보다는 이러한 일반적인 흐름 속에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세비야에 거주하던 제노바 출신 상인인 프란체스코 피넬리는 콜럼버스의 1차 항해에 재정 지원을 한 후원자 중 한 사람이었다.


122쪽


당시 유럽은 이미 인쇄술의 시대로 들어갔다. 콜럼버스는 이 흐름의 최선두에 서 있었다. 그는 당시로서는 놀라울 정도로 많은 책을 소유하고 또 읽었다. 


167쪽


항해의 말미에 이런 고난을 당하고 종교적 봉헌을 약속함으로써 이 여행은 일종의 순례가 되었다. 즉, 자신의 죄를 지우고 신에게 의탁하여 갱생을 도모하는 의미가 부여된 것이다. 


188쪽


그의 사고는 매우 흥미로운 특징을 보여준다. 그는 우리가 지금껏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세속적인 동시에 훨씬 더 종교적이다. 자기 아들이 추기경 직을 얻을 수 있도록 교황에게 부탁해 달라는 지극히 속된 요구를 하는 내용과 대규모 십자군을 동원해 예루살렘을 회복하여 하느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고자 하는 내용이 하나의 글 안에 동시에 나온다. 이는 우리에게는 모순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오히려 그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205쪽


'문명화'의 다른 이름은 곧 '식민화'였다. 현지에 정착할 사람들 중에 농부와 장인이 포함되었고 가축과 종자를 가지고 갔다. 말, 가금류, 양, 염소 등을 실은 콜럼버스의 2차 항해 선단은 마치 노아의 방주를 연상시킨다. '원주민들에게 옷을 입히려는' 스페인 측의 이런 문명화/식민화 사업 계획은 다른 나라에까지 소식이 퍼져 갔다. 2차 항해를 위해 열일곱 척의 배가 준비되었고 여기에 1천 명 이상이 참여했다. 1차 항해와는 비교가 안 되는 대규모 선단이었다. 이 선단은 1493년 9월 25일 카디스를 떠나 카나리아로 향했다.


269쪽


그는 성경에 나오는 솔로몬의 금광을 드디어 발견했다고 확신한 것이다. 앞으로 할 일은 그 금을 이용해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시온 산에 성전을 다시 짓는 일이다. 이것은 아시아 세계 전체를 기독교화하는 대 사업의 시작이며, 길게 보면 인류 구원 역사의 마지막 단계다. 요아킴은 그 일을 주도할 인물이 스페인에서 나온다고 예언했다. (중략) 금에 대한 콜럼버스의 태도는 이처럼 세속적이기보다는 종교적인 의미가 더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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