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전우용] 서울은 깊다(2008)

독서일기/도시토목건축

by 태즈매니언 2015. 7. 22. 23:17

본문

 

이 책은 서울에 얽힌 역사와 민속에 대해서 유용한 정보들을 많기 주긴 했다. 그런데 언어학적인 분석이 전무한 상태에서 어원을 아무데나 가져다붙이거나 이미 근거없는 낭설로 밝혀진 사실들을 아무런 코멘트 없이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동의보감이 훌륭한 의서라고 배우긴 했지만 은형술, 분신술, 기문둔갑술을 가능하게 하는 비방을 수록하고 있다는 깨는(?) 부분들 때문에 난 동의보감을 따랐다는 처방들을 선뜻 믿지 않는데 이 책도 같은 느낌이다.

 

저자가 학계의 변방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적어도 내가 타인의 저작물을 인용하거나 갈무리할 때 이게 근거나 출처가 제대로 된건지 미심쩍은 지경이면 논픽션으로서는 문제가 있는게 아닌가 싶다.

 

그래도 인상깊었던 구절들은 남겨본다.
(특히 물장수들의 급수권에 대한 내용은 흥미로웠다. 근대 법체계 도입 이전에도 존재했던 것인지 궁금한데 이에 대한 연구가 가능하면 꽤나 재미있을 것 같다.)

----------------------------------------------------------------------------------

36쪽

 

이방원은 서울로 환도하자마자 창덕궁을 짓고 종로에 행랑을 건설했으며, 개천을 준설했다. 창덕궁과 시전으로 인해 전조후시 좌묘우사의 격식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중략) 창덕궁에서 궁역과 궐역을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궐내 각사는 왕의 전각에 종속되어 있다. 왕이 전유하는 후원은 무척 넓고 잘 가꾸어져 있지만, 신하들을 위한 공간적 배려는 찾아보기 어렵다. (중략) 정도전의 서울과 이방원의 서울은 부조화된 채로 서울의 원형을 구성했다.

 

45쪽

 

다중을 일시에 모아놓을 수 있는 대형 광장이나 경기장을 갖추지 않은 도시는 거의 없었다. (중략) 거대한 경기장은 도시의 지배력과 동원 능력을 과시하고 그 통합능력을 구현하는 장소였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자신들이 모시는 신의 힘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중세의 서울은 세계 도시가 지닌 보편성에 비추어 본다면 무척 특이한 도시였다. 서울에는 경기장은 물론이요 작은 극장조차 만들어지지 않았다. 신전이라 할 만한 것도 없었다. 종묘와 사직, 문묘와 국사당, 그 밖에 왕이나 그 대리인이 가서 제사를 지내는 여러 곳의 제단이 있기는 했지만, 대규모 군중이 종교적 일체감을 얻을 수 있는 공식적인 행사도, 그를 위한 공간도 없었다.

 

65쪽

 

17세기까지 도시 서울이 배출하는 도시 생활의 부산물들은 이들 세 요소 - 텃밭, 개천, 가축 - 에 의지하여 그럭저럭 안정적으로 처리될 수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이 안정성이 갑작스럽다 싶을 정도로 빠르게 무너졌다. 당장 서울의 장(창자)이라 할 수 있는 개천의 물길이 막혀버렸다. 영조 회심의 업적이었던 준천은 바로 서울의 소화불량을 치료하기 위한 사업이었다.
(중략)
재는 분뇨와 섞이면 훌륭한 퇴비가 된다. 그러나 그건 농촌에서만이다. 도시에서는 더 이상 썩지도 않고 물에 잘 쓸려 내려가지도 않는 괘씸한 오물일 뿐이다. 땅바닥에 깔려 있던 재가 흙과 섞여 있다가 물에 쓸려 개천에 들어가 다시 똥과 버무려지면 하천 바닥에 딱 붙어버릴 수밖에. 조선 후기 서울 개천 폐색의 주범은 다름 아닌 도시민들 자신이었다.

 

79쪽

 

숙종 23년에는 병조판서 민진장을 도성 내 거지를 주관하는 당상관으로 삼는 일도 생겼다. '거지 당상'이 출현한 것이다. 그러나 거지 당상이라고해서 무슨 묘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재정에 조금 여유가 있으면 죽을 쑤어 먹이고, 겨울에는 거적이나 폐지를 의자(옷을 만들 재료)라 해서 나누어주는 데 불과했다. 갖은 방법을 써도 거지가 줄지 않자 정부는 거지들의 본거를 일일이 조사하여 고향으로 되돌려 보내고, 거지를 많이 배출한 지방의 수령은 따로 논죄하기까지 했다.

 

146쪽

 

1934년 여름, 당주동에서는 한 젊은이가 집에 물 길어다 주는 물장수에게 '하게체'로 말했다가 20여 명의 물장수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북촌 젊은이에게 체질화되어 있던 '양반의 습성'과 새로이 '시민권'을 얻은 북청 출신 청년들의 '익명성에 기댄 평등의식'이 정면으로 충돌한 사건이었다. 사람들은 이런 사건들을 일상에서 무수히 겪으면서 차츰 언어생활에서 신분적 구분선을 걷어냈다.

 

217쪽

 

1902년 고종확제 어극 40년, 망육순, 칭경 기념 대제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탑골공원 한복판에 팔각정이 만들어졌다. 이 건물을 지은 도편수 최백현은 지금 교보빌딩 앞에 있는 기념비전을 지은 인물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대로 원형의 원구단과 팔각형의 황궁우는 제국과 황권의 상징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탑골공원 한복판에 들어선 팔각적은 다름 아닌 '황제가 인정한 민권'의 상징이었다.

 

231쪽

 

서양식 시간 구분법이 현실적 힘을 갖기 시작한 것은 개항이후였다. 1887년 통리아문 장정은 직원의 출근 시간을 사시초(오전 9시)로, 퇴근시간을 신시초(오후3시)로 규정하고 그를 함부로 어길 수 없게 하는 한편, 휴목일을 당시의 외국통례에 따라 7일 1회로 정했다. 그전까지 서울의 관리들에게는 당제에 따라 5일마다 하루씩의 휴일이 주어졌지만, 대외 교섭을 담당했던 통리아문은 서양인들의 생활 리듬에 맞추기 위해서라도 7일 1휴제를 채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316쪽

 

서울시에 수돗물 공급이 개시되자 물장수와 물주인들은 졸지에 생산자로부터 소매상으로 그 지위가 바뀌었다. 1908년 6월, 물 관련 영업자 수천 명이 모화관에 모여 대한수도회사에 급수권을 배상하라고 요구했다. 수도꼭지로 인해 개개 우물 단위로 구획되어 있던 급수 구역이 소멸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급수 구역은 곧 돈이었다. '우물에서 물 길어 팔 권리증'은 비록 공인된 것은 아니었으나 관행적으로 매매되고 있었다. 그 권리증이 휴지 조각이 될 판이니 물주인들이 들고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