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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희] 이완용 평전(2011)

독서일기/인물

by 태즈매니언 2015. 8. 16.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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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특명전권대사 이토 히로무비의 강권에 따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귀속하는 것을 주내용으로 하는 한일협약안에 대해 8명의 대신 중 일부 수정을 전제로 수용의견을 표명한  5명을 을사오적이라고 배웠다. 그리고 을사오적 중 가장 유명한 이가 이완용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인물이지만 실상은 제대로 아는 바가 없는 인물 중 하나가 이완용이라고 생각했다.

이 책의 제목에도 불구하고 제대로된 평전이 아니라 아쉽다. 전체적으로 이완용의 행동들에 대한 사실관계와 저자의 해석이 분리되지 않은 채로 서술되고 있었다. 게다가 중요한 분기점마다 등장하는 이완용의 행적에 대한 저자의 해석을 뒷받침할만한 1차 자료가 제대로 제시되고 있지도 않았다.

 

어쨌거나 이완용은 출신성분상 근왕의 입장에 출신한 합리적인 관료였고, 고종의 경운궁 환궁시기까지는 배경상 친미적인 세력을 기반으로 하여 친러파와 연합하여 일본을 견제하는 입장이었지 일신의 안위만을 추구했던 친일파는 아니었다는 점.  '을사오적'의 악행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입장은 신하들에 대해 선조와 같은 견제책을 썼고, 자신의 전제군주로서의 권한을 놓지 않았던 고종의 전략으로 인해 이토 히로부미의 강권을 거부할 수 있었던 명분이 마땅치 않았던 상황이었다는 점, 그리고 1905년 당시 을사조약안에 대해서 고종이 자신의 반대의사를 명확하게 표시하지 않고, 신하들에게 판단을 미뤘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을사오적에 대한 폄하는 고종이 감당했어야할 부분까지 책임을 지운 불공평한 비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완용보다는 송병준이 진짜 매국노라고 해야할 것 같고. 국제정세적으로 민감한 시기에 이용익이나 김홍륙 등과 같은 이들을 측근으로 신임하며 변덕스런 복고정책을 추구했던 고종의 허울뿐인 구본신참 정책에 대한 비판이 앞서야 할듯 싶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이 결과적으로 한일병탄을 가속화하기는 했지만 이로 안해서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이 생각했던 점진적인 보호국화에 비해서 조선 민족의 순응성을 저해하였고, 이로 인해 결과적으로 2차 대전 결과에 따라 우리나라가 독립할 수 있었겠다는 생각도 스쳐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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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쪽

 

이완용은 부조리한 사회의 구조와 관행이라는 거대한 힘에 맞서 승산 없는 싸움을 할 만큼 분노와 투지를 가진 인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지방 향리 및 양반 토호와 한패가 돼서 진흙탕 속에 자신을 내던질 만큼 탐욕스러운 인물도 아니었다. 목민관으로서의 자세를 되새기면서 자신만이라도 오롯이 지켜내려 노력하는 완고한 원칙주의자도 아니었고, 주위의 시선을 무시하고 과감하게 관행을 잘라내는 과격한 행동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주어진 상황에서 어느 누구에게 일방저으로 피해가 가지 않는 방법을 찾아내서 가능한 한 무리수를 두지 않고 일을 처리하려 하는 현실주의자, 합리주의자, 실용주의자였다.

 

192쪽

 

일본공사 하야시는 권중현의 말을 묵살하고 고종을 압박하기 위해 직접 그를 찾아갔다. 대신들은 하야시의 입궐을 막으려고 했지만 소용없어지자, 하야시보다 앞서 고종을 만나 대책회의를 열였다.
(중략)
고종은 몹시 괴로워하면서 여러 차례 대신들에게 대책을 물었다. 이완용을 비롯한 대신들은 모두 이 조약을 허락할 수 없다고 답했다. 뾰족한 대책이 없는 가운데 고종은 일단 결정을 미루고자 했다. 이 때 이완용이 고종에게 매우 절박하게 질문했다. 그는 고종에게 품고 있는 생각이 있으면 모두 말해야 한다고 하면서 대신 8명이 이 일을 막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고 했다.
(중략)
외부대신을 지냈던 이완용은 러시아와 일본의 외교적 마찰이 있을 때마다 최고 결정권자로서 짊어져야 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결정을 미루면서도,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키기 위해 다른 대신들을 부추겨왔던 고종의 태도를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고종이 조약을 끝까지 반대할 의지가 있는지를 확인하려 했다. 이토 역시 이 전의 대화에서 "쉽지 않은 책임을 폐하 스스로 지게 되는 것을 두려워 하시기 때문"에 "인민을 선동하여 일본의 제안에 반항을 시도하려는 생각"이 있다면 이는 화를 불러올 것이라고 협박하고 있었다.

 

198쪽

 

이와 같이 을사조약은 고종과 9명의 대신들 누구도 찬성하지 않고 결정하지도 않은 채,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되었다. 그리고 최고 결정권자였던 고종이 '거부한다'는 분명하고 공싱적인 결정을 내리지도 못한, 그래서 결정한 바 없이 결정된 조약이었다.

 

201쪽

 

대부분의 유생들이 최고 결정권자였던 고종을 차마 거론하지 못한 채 모든 책임을 을사5적에게 떠넘기고 있었지만, 최익현은 고종의 허약과 무능을 정면으로 엄중하게 꾸짖었다.
"계책을 먼저 정하지 않고 전전긍긍하다가 비록 폐하께서 윤허하지는 않으셨지만 끝내 나약하고 용렬한 태도를 면치 못하였고, 비록 참정이 굳게 거절하기는 하였지만 그래봐야 '가할 가'자를 쓰지 않았을 뿐입니다."라고 하며 당시에 절대적인 존재였던 임금에게 차마 할 수 없는 언사까지 사용하면서 고종의 허약함을 비난했다.

 

238쪽

 

이토 히로부미의 사망으로 일본 여론은 일제히 대한제국 문제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한다면서 합방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일본 기자단 또한 조선문제 동지회를 결성하여 대한제국 합방을 주장했다. 내부대신 사퇴 이후 일본에서 공공연하게 합방을 주장했던 송병준은 일본 여론에 부응하여 일본내륙 낭인 및 군부 세력과 구체적인 합방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 때 그가 제시한 합방안은 사실상 식민지화 방안이었다. 그는 11개 방법을 제안했다.
(중략)
송병준은 대한제국의 합병을 통해 이완용 내각을 전복시키고, 자신이 일본과 조응하여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241쪽

 

1905년 이후 계몽운동 지식인들은 독일의 국가연합론을 차용하여 보호국과 식민지가 다르다는 점을 설명해왔다. 국가연합론에서는 스웨덴-노르웨이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곡, 독일 연방국, 미국 연방국을 국가연합의 형태로 분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한제국 지식인 대부분은 보호국을 이러한 국가연합 형태에서 가장 낮은 단계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보호국이 주권의 전면적 상실이 아니라는 논리를  전개했고, 실력을 양성하면 명실상부한 독립국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이용구와 이완용의 합방안은 이러한 국가연합론 중에서 헝가리의 자치권이 확보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모델로 하여 외교권과 군사권을 일본에게 이양하는 대신 황제를 그대로 두고 통치는 독자적으로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합방안은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 과정에서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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