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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웨더포드/이종인 역] 칭기스 칸, 신 앞에 평등한 제국을 꿈꾸다(2016)

독서일기/인물

by 태즈매니언 2019. 9. 20.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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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 김호동 교수님의 책을 통해 몽골제국이 세계사라는 관념을 탄생시켰다는 흥미로운 발상을 접했다. 내가 읽어본 칭기스 칸을 다룬 책들 중에서 가장 설득력있었던 책인 <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원제:칭기스 칸과 근대 세계의 형성)>의 저자 잭 웨더포드의 최근작. 원제는 <Genghis Khan and the Quest for God(2016)>

 

저자는 에드워드 기번이 <로마제국쇠망사>의 마지막 권에서 '몽골의 진중에서는 다른 종교들이 자유와 조화 속에서 공존한다'고 언급한 각주 하나와, 1776년 미국 독립선언문과 1777년 버지니아 종교자유 법안(Virginia State Bill for Establishing Religious Freedom) 초안을 작성했던 토머스 제퍼슨이 칭기스 칸의 전기들을 여러 권 수집했고 주변에 선물하기를 좋아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여기서 실마리를 잡고 '종교를 이유로 어떤 사람을 방해하거나 괴롭혀서는 안 된다'는 칭기스 칸의 첫 번째 법률과 버지니아의 종교의 자유에 관한 주법, 나아가 미국 수정헌법 제1조가 이어진다는 대담한 가설을 제기한다.(결국 사료로 입증하지는 못함)

 

몽골인들은 인간화된 신성이 아닌 시베리아 샤머니즘에서 발원한 텡그리 신앙을 믿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종교에 대해 관용적이었고, 특정 종교를 부정하거나 하나의 절대적 교리가 있다고 믿지 않았다. 난 이정도만 알고 있었다.

 

책을 읽으며 6~7세기 몽골 평원을 지배했던 투르크족, 8~9세기 세계 최초이자 유일하게 마니교 국가였던 위구르 제국, 11세기 위구르족이 무슬림이 되자 마니교도에서 기독교도로 변신의 과정을 짚어가면서야 비로소 왜 칭기스 칸 이전의 몽골 초원에 '시레문(솔로몬)'같은 이름이 쓰였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몽골족 치하의 종교의 자유는 개인의 권리였는데 유럽과 신대륙에서는 30년 전쟁과 18세기에 철학적으로 논의되었던 역사적 사실이나, 종교적 관용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정체성의 정치가 힘을 얻어가는 요즘 시기에 읽다보니 중간중간 천천히 음미할 부분들이 많았다. 번역가 분의 인명 표기가 몽골사를 다른 다른 책들과 너무 달라 불편한게 흠.

 

칭기스 칸의 생애가 워낙 드라마틱하고, 인류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군대를 이끈 정복자였기 때문에 오히려 그의 다른 훌륭함들은 조명을 못받은 편이다.

 

광대한 지역을 누비며 전쟁을 하는 와중에도 이름난 종교인들을 불러 지치지 않고 대화를 나눈 칭기스 칸은 도덕, 삶의 의미, 혹은 신성함의 본질에 관한 적절한 지식을 보여준 성직자는 아무도 없었다는 걸 깨닫는다. 결국 칭기스 칸 자신이 평생 살면서 보여준 것처럼 옳고 그름은 책이 아닌 실행을 통해 보여줄 수밖에 없다.

 

칭기스 칸이 세운 종교적 관용의 정신이 몽케 칸의 치세 이후로 급격히 무너지면서 몽골제국의 토대가 약화되었다는 저자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김용의 <사조영웅전>에 등장하는 왕중양의 사제이자 전진칠자의 일원인 도교 도사 구처기의 실체(?), 처인성 김윤후 승장의 활약의 나비효과와 소림사의 강호 데뷔(?)의 관계에 대한 가설과 같은 깨알 재미도 곳곳에 박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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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쪽

 

오늘날 비단은 주로 사치품으로 알려져 있으나, 몽골족에게는 아주 실용적인 물품이었다. 중국의 직조공은 아주 촘촘한 비단을 짯기 때문에 이를 비롯해 벌레들이 비단을 파고들지 못했다. 다소 품질이 떨어지는 비단일지라도 비단 올이 너무 미끄러워서 이가 거기에다 알을 붙일 수가 없었다. 목욕하기가 쉽지 않은 몽골의 차갑고 건조한 환경에서 중국 비단은 이런 특징 덕분에 귀중한 물품이 되었다.
(중략)
사람이 화살에 맞으면 비단의 강하고 매끄러운 섬유는 살 속으로 파고드는 화살촉의 주위를 솜처럼 감싼다. 그러면 심한 상처도 크게 완화되었고, 더욱 중요하게는 더 큰 피해나 감염의 염려를 확실히 줄이면서 그 화살촉을 부드럽게 빼낼 수 있었다. 전사에게 비단은 마법의 천이었다.

 

411쪽

 

이지상과 거의 동시에 카라코룸에 도착한 프랑스 사절 루브룩의 윌리엄은 교회 하나와 모스크 두 개를 포함하여 열두 개의 종교 시설을 목격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카라코룸엔 그 외에도, 도교, 유교, 불교 사원들도 있었다.

 

414~415쪽

 

1232년 고려와 벌인 전투에서 몽골 사령관이 한 불교 승려의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몽골 지휘관이 승려에게 죽은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중략)
도교에서 제공하는 장수의 영약은 싸우는 법을 잘 아는 불교 승려들의 뛰어난 무예에 비하면 보잘 것 없었다. 그래서 몽골인들은 불교도들을 적이 아닌 아군으로 삼고자 했다.

몽케 칸은 고려에서 승병들을 데려오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오늘날 허난 성의 오래된 사찰인 소림사에서 '복유'장로를 카라코룸으로 불러 소림사 지부를 만들도록 했다.
(강호무림의 태산북두는 고려의 김윤후?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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