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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다우어/최은석] 패배를 껴안고(1999)

독서일기/일본

by 태즈매니언 2017. 3. 15.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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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학으로 유명한 MIT의 존 다우어 명예교수가 쓴 <패배를 껴안고>를 드디어 다 읽었습니다! 본문만 740페이지에 각주와 색인도 백페이지가 넘다보니 손에 들고 읽기 버겁긴 했는데 2000년 퓰리처상은 괜히 받은 게 아니더군요. 올해의 책 리스트에 들어갈 것 같습니다.

이 책은 맥아더 사령관과 주둔군(GHQ)이 지배한 1945년 8월부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평화헌법에 따라 일본정부가 수립된 1952년 4월 28일까지 전쟁에서 패배한 일본인들이 겪었던 일들과 심리상태를 방대한 자료를 통해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존 다우어 교수의 일본인 아내 야스코씨의 조력도 책의 완성도에 큰 도움을 준 것 같네요.

존 다우어는 패전한 일본이 미국의 군정을 통해 도움 받은 것도 많이 있지만 '천황제도와 전쟁책임' 그리고 '헌법제정' 문제에 있어서 주권자의 의사가 아닌 미국 군정에 의해 결정된 것이 삼장법사가 손오공에게 씌워준 '금고아'처럼 일본이 근대민주주의 국가로서 성취했어야할 것들을 이룩하지 못한 미성숙한 국가로 남아있게 되는 제약을 가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정말 탁월한 분석인 것 같은데 이 책을 읽은 일본인들의 소감이 궁금하네요.)

귀축미영(鬼畜米英)을 부르짖던 엘리트들이 하루만에 천연던스럽게 말을 바꾸면서 당시 정부 연간 예산을 넘는 가치가 있던 비축물자들을 횡령한 까닭에 암시장이 아니면 식량과 물건을 구할 수 없었던 상황과 일본 전체 예산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던 주둔 미군 지원비용(전쟁종결비용) 지원의 굴레로 인한 '참기 힘듦을 참는' 과정에서의 육체적 정신적 피폐.

군정 하에서 전시체제보다 비대해진 관료체계, 군국주의를 지양하고 개인주의에 기반한 민주주의를 시도해볼 시민들의 에너지가 있었는데도 '배급된 자유(가와카미 데쓰타로의 표현)'의 한계로 인해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보수적 헤게모니와 코포라티즘에 밀려난 '역코스(reverse course)'는 결정타였고요.

존 다우어는 유산으로 인해 패전 후의 일본인들이 '정치 사회적 권력에 대한 집단적 체념과 대중은 실제로 사태의 진전에 영향을 미칠 능력이 없다는 관념에 대한 집단적 체념의 강화'라는 사회화 과정을 겪었다고 봅니다. 우리나라 현대사도 파란만장하지만 적어도 이 부분에서는 일본보다 나은 것 같습니다.

이 과정에서 천황의 명에 따라 전쟁에 참전하고 이들을 지원하느라 고생했던 국민들이 겪었던 가치관의 혼란에 대해서 퇴역 군인 '와타나베 기요시'라는 개인의 사례가 특히 인상깊었습니다.(<산산조각 난 신>이란 책을 썼던데 아쉽게도 번역이 안되어 있네요.) 이와 반대편에는 패전 후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에 참전해서 기사회생했던 전범 쓰지 마사노부와 같은 사례도 있지만요.

법학을 배웠다보니 전 1947년 5월 3일 발효된(골든위크를 구성하는 휴일이죠) 일본 평화헌법 제정의 막후에 대한 내용이 제일 재미있더군요. people을 '인민'이 아닌 '국민'으로 번역하려고 애를 썼던 이유, 당시 스물 두 살의 유태인 여성이었던 베아테 시로타 덕분에 미국 헌법에도 없던 '양성의 본질적 평등'이 들어갔다는 에피소드. 일본국헌법 제9조의 부전조항과 제66조 '문민'조항과의 논리적 모순이 발생하게 된 이유 ㅎㅎ

두 번째로 재미있었던 부분은 전쟁범죄에 대한 국제법상의 단죄의 사례로 일컫어지는 도쿄 재판에 대한 15장이었습니다. 존 다우어는 미국이 일본에서 가장 실패했던 정책으로 비판하고 있지요. 일본이 저지른 전쟁 범죄에 대한 일본인들의 반성과 아시아 각국의 징죄를 통한 화해의 장이 될 수 있었던 기회를 전쟁 범죄에 대한 염증과 망각을 불어일으키게 만든 악수(惡手)였던 것 같아 읽으며 아쉬웠습니다. 재판부의 구성이나 재판의 진행절차 모두 근대사법체계라고 하기에는 낯뜨거울 정도였습니다. 이러니 재판기록도 공개하지 않고 있는 거겠죠. 뉘른베르크 전범재판도 칼 되니츠 제독처럼 불합리한 판결사례가 있긴 했지만 도쿄 재판에 비할 바는 아닌 것 같습니다.

스물 네 명의 미국인들이 실질적인 제헌위원이 되어 만들어준 헌법을 70여년 째 쓰고 있는 상황, 왜 일본의 야쿠자들은 그렇게 세를 확장할 수 있었고 시민들의 거부감이 덜했는지, 조선인, 중국인, 인도네시아인, 필리핀인 등 아시아인들이 종전 후 일본에서 제대로 된 역할이나 영향력도 갖지 못한 채 투명인간 취급 당했는지, 도조 히데키의 한국전쟁 발발 예언까지,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들은 정말 많습니다.

한국전쟁이 일본에게 정말 적절한 시점에 발발했다는 점이 좀 얄미운 부분이 있었지만 그 한국전쟁 특수를 타고 고정되어버린 일본의 정치사회시스템이 '성공의 굴레'가 되어 일본이 진정한 근대민주주의 주권국가로 도약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걸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90년대 초반 'Japan as No.1'이라는 칭찬을 듣던 시대야 착각에 빠져 살 수 있었겠지만 이젠 쓰라린 현실을 직시하고 자기 갈 길을 개척해나가야하는 시점이니까요.

우리나라도 해방 직후부터 정부출범 이전까지의 기간에 대한 역사가 흐릿한 부분이 많고, 이 때 결정된 제도들이 이후의 경로를 제약한 경우들이 많다보니 일본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남의 나라 이야기같지 않더군요. 그런 의미에서 그렉 브라진스키의 <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도 읽어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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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쪽

"맥아더와 두 차례 이상 대화한 적이 있는 일본인은 겨우 열여섯 명이었으며, (후략)"

355쪽

히로히토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충실한 신하들이 비난받고 처벌되며 전범 재판에 기소되는 동안, 히로히토는 하늘의 축복으로(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맥아더의 축복으로) 살아남아 영화를 누렸다. 일보느이 침략전쟁에서 천황의 역할을 진지하게 캐묻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미국인들은 그를 설득하여 그의 이름으로, 또한 그의 허락으로 이루어진 억압과 폭력에 대한 그 어떤 책임도 인정하지 않게 했다. 황실 측근 일부에서 그를 퇴위시켜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왓을 때 SCAP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사실 점령군은 천황을 성전으로부터 분리했을 분만 아니라 그를 새로운 민주주의의 한가운데 자리에 앉혀 버린 것이다.

이 신비스러운 변화가 낳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여파는 대단했다. 이제 정의는 기준이 없는 것이 되었다. 전쟁 책임을 진지하게 추궁하는 것도 편향적으로 보였다. 세속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나라의 최고 지도자가 최근의 사태에 대해 아무 책임을 지지 않고 있는데, 평범한 신민들이 왜 전쟁 책임을 반성해야 한단 말인가?

413쪽

히가시쿠니는 퇴위하기에 좋은 세 가지 '적절한 기회'를 천황에게 제시했다고 일본 언론에게 직접 공개했다. 첫 번째 기회는 '항복 문서에 서명할 때'였고, 나머지 두 번의 기회는 '헌법 개정'과 '점령 종결 시의 평화 조약 체결'이었다.

537쪽

원폭이 투하된 두 도시의 사진을 시민들이 비로소 보게 된 것은 점령이 시작된 지 7년이 지난 1952년 8월 원폭 투하 7주기 때였다.

612쪽

특히 정도를 벗어난 부분은 (도쿄 재판에) 조선인 판사나 검사가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로 (중략) 조선인의 처지는 도쿄 재판에서 실행된 승자의 처벌이 지니고 있던 더 넓은 범위의 비정상성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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